인자(人子)의 임하심은 상당히 은유적이고,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된다. 마치 선악지식의 나무를 이렇게 저렇게 비유의 해석을 하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과 같고, 성전보좌앞에 네 생물이 있어서 다양한 얼굴을 보여주듯이 그러하다. 비유는 하나를 특정하지 않고 본질을 은밀히 깨닫도록 안내해준다.
누가복음 17장 20절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게 임하는 것인데, 마태복음 24장 재림의 말세현상과 같다. 마태복음 24장의 말세현상은 누가복음 21장 20절과 같다. 그때는 AD70년을 말한다. 그렇다면 재림은 AD70년에 완결되었나? 이런 다양한 해석이 상상의 나래로 펼쳐지는데, ‘인자의 임하심’에 대한 사람의 생각이 편협되어서 그렇다. 이미 주님은 말구유에 태어나시면서 마리아와 요셉과 목동들에게 출현하셨다. 30세가 되셨을 때는 세례요한에게, 12제자에게, 유대인들에게 출현하셨다. 인자의 임하심이 먼데 있는 것이 아니다. 구약 4천년 내도록 하나님은 임재하셨다. 공기가 편만하듯, 바람과 구름과 햇살로서 하나님은 바벨론에서도, 이집트에서도, 신광야에서도 함께 임재하셨다. 사람들이 몰라서 깨닫지 못한 것이다. “도끼가 나무에 놓였다”는 심판의 말씀에서 도끼를 들고 있는 나무꾼은 하나님이다. 로마의 도끼가 유대교의 나무를 벨 때, 인자가 임하신 것이다. 이때는 심판으로 임하셨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시고, 십자가를 지고서 골고다로 가실 때, 이때도 인자가 임하셨다. 이때는 죄인의 모든 죄를 대속하는 희생양으로 임하셨고, 구원주로 임하신 것이다. 어느 특정한 날만 생일처럼 주의 임하심을 학수고대하면 무슨 재미로 사는가? 영원한 종말의 재림이 분명 존재하지만, 그때가 오기까지 주님은 계속 우리와 함께 계신다. 작은 재림(再臨)은 성경을 깊게 고찰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려면, 전화를 하고 시간을 정해서 만나면 된다. 그처럼 성경을 통해서 성령의 감동으로 주님을 부르면, 마음 깊은 곳에서 만남을 가질 수 있다.
누가복음 17장 11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갔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초림에서 재림까지 역사를 펼치시면서 과거와 미래 사이로 지나시다가 지금 현재의 마을에 내려오신다. 재림때만 오시는 것이 아니다. 인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음의 마을속으로’ 들어가신다. 인자(人子)는 곧 사람으로 온다는 것이다. 사람의 삶속에 지금 온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분명히 말씀하셨다.
[요한계시록 3:20]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은 노아시대와 소돔시대를 비유했다. 노아는 배를 만들어서 시대를 대비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갈 때까지 마을 주민들을 놀고 먹고 장가가고 시집갔지만, 홍수가 나자 모두 멸절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들어가신 때가 바로 방주의 문이 열린 시점이다. 그리고, AD70년이 홍수가 내리듯 심판이 임한 때이다. 40년이 십자가의 배에 타는 기간이었다.
소돔과 고모라 심판에 있어서 예수님은 ‘롯의 처’를 언급하셨다. 롯의 처는 뒤돌아보면서 소금기둥이 되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소금이고, 빛이다“라고 선언하셨는데, 롯의 처는 소금기둥이 된 여자다. 십자가 사건때 제자들은 도망치면서 세상으로 돌아갔다. 디베랴 호수로 돌아가서 모두 롯의 처처럼 소금기둥이 되었다. 롯은 아내를 구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신부된 교회를 구하시려고 모든 심판을 스스로 감당하셨다.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 쏟아졌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등지고 도망가는 것 같지만, 제자들을 빼내시고 당신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그대로 적용하면 오직 예수님만 살아남아야하는데, 예수님만 구원을 받지 못하고 진노의 심판이 십자가에서 종결됐다.
생명의 구원주로서 소방관처럼 우리를 멸망에서 구출해주신 예수님을 이제는 사랑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