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는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을 강조한다.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 영원한 것와 임시적인 것, 영적 양식과 육적 양식을 구분한 후에 삶속에서 영양보충을 해야한다. 영의 양식과 육의 양식은 모두 섭취해야 기능이 제대로 발휘한다.
영적 양식은 지식의 재료로 구성된다. 말씀은 “말과 씀”의 합성이다. 모든 말은 “씀의 면류관”을 통해 존귀를 받는다. 말이 종이에 기록되면 글이 되고, 상대의 고막을 통해 마음에 기록되면 변화를 낳는다. 창세기에서 “선악과 금지령 말씀”이 아담과 하와에게 기록되지 못했다.
주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고 단언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 말씀을 망각하고 설탕처럼 달콤한 향락을 추구하고, 거룩한 예식에 쓰일 포도주를 방탕의 술취함으로 즐기고, 세상 권력에 갇혀 피라미드의 노예가 된다면, 주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진리다. 그러므로 우리에 대한 주님의 언약이 진리가 되도록 스스로 삼가 자신을 올바르게 행해야한다.
대화는 언제나 음식이다. 언어가 맛있는 밥이요, 반찬이요, 국물이다. 이때 한쪽이 요리사, 다른 쪽이 손님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일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했다. 말씀을 전하는 자도 그 말씀을 들을 수 있게 스피커 시설을 잘 갖춰야한다. 이런 스피커를 “듣는 스피커”라고 한다. 사람은 말을 하면서 자신의 말을 듣고, 상대의 반응으로 들어야한다. 무조건 말의 반찬을 꺼내기만 하면 안된다. 소풍가면 각자 싸온 도시락 반찬 내놓듯이 사연을 꺼내놓고 대화의 잔치를 즐겨야한다.
화법이론은 매우 중요하다. 화법이론의 핵심은 입과 귀의 균형감각이다. 입속에는 혀의 요리사가 있고, 귀속에는 고막의 미식가가 있다. 둘은 “지음”과 같은 절친이다. 일반인은 말하기 급급하고, 상담가는 듣기 급급하다. 둘을 조화롭게 할 수 있으면 대화는 즐겁고 신나는 여행이다. 반면, 한쪽의 일방적 떠듬이면 대화는 졸립다. 화법이론의 철칙은 “말하는 자가 듣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성경을 읽을 때도 2가지로 해야한다. 첫째 성경말씀의 배경과 상황을 상상하면서 무대를 마련하는 것이다. 무대위에서 주님이 직접 말하듯 읽어야한다. 둘째, 성령이 그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해야한다. 이런 방법을 “성경이 사람을 읽는다”라고 표현한다.
가령, 거라사인의 귀신 들린 사람을 읽을 때, 그 무대를 생각하면 1. 공동묘지의 귀신들린 사람 2. 골고다의 예수님 3. 궁궐의 헤롯왕 4. 미친 네로황제가 떠올라야 한다. 예수님이 거라사인처럼 분노함으로 그 가라사인을 치유했고, 결국 권력의 사슬에 묶인 네로와 헤롯왕의 광풍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잔잔해질 수 있음을 우리는 믿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