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년(己亥年)은 황금돼지다. 돼지는 12띠에서 가장 끝이다. 마침표를 2개 찍은 것은 곧 기해년이다. 사도 요한은 모든 사도들의 종결자였고, 마지막 생존자였다. 끝까지 밧모섬에서 마침표의 삶을 살았다. 그래서, 그의 증언은 더 애절하고, 장엄하고, 본질을 향한 것일까? 다른 복음서와는 무게감이 다르다. 다른 복음서는 세례요한을 높였다면, 요한복음은 세례요한의 본질을 ‘등불’로 격하한다. 빛과 등불은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증거의 등불로서 니고데모를 내세우고, 예수님의 행하심이 증거의 등불임을 말하고 있다.
‘빛’은 ‘보는 것’이다. 요한복음 9장에서 맹인을 통해 죄문제를 직접 거론한다. 제자들이 물었다. 맹인이 누구의 죄로 말미암았는지, 그러자 예수님은 맹인의 눈을 뜨게 했다. 맹인이 눈을 뜬 그날이 하필이면 안식일이었다. 안식일에는 맹인을 치료하면 안된다. 현행법을 어긴 것이다. 마치 의료법과 흡사하다. 예수님이 의료법을 위반한 것은 아니다. 단지, 안식일에 병을 고친 것을 어긴 것이다. 마치 한의사가 X-레이를 활용해서 환자들을 검증하자 양의사들이 소송을 거는 것과 같다. 카이로프랙틱 방법으로 무면허 의료인이 아픈 사람을 치료하자, 의료법 위반으로 고소를 받은 것과 같다. 자격없는 자가 자격의 일을 행하면 그것이 불법이다.
맹인이 눈을 뜨면서 진짜 문제가 발생했다. 죄의 개념이 완전히 달라진다. 예수님이 갑자기 죄인이 된 것이다. 맹인이 받았던 죄인취급이 예수님께로 넘겨졌다. 제자들이 맹인을 놓고 죄값을 운운했는데, 이제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죄를 놓고 심각하게 모의했다. 그들의 하는 짓이 늘상 그렇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것에는 관심없고, 자기들의 이권과 실속을 채우는 것만 급급하다.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공통점은 ‘정죄’에 있다. 맹인을 보고 죄를 생각했던 제자들이고, 맹인이 눈을 뜬 것을 보고서 안식일의 범죄를 먼저 생각한 바리새인들이다. 이들은 ‘죄의 관점’에서만 세상을 쳐다봤다. 반면, 예수님은 의의 관점에서 세상을 재해석했다. 죄의 관점은 창세기 3장으로 연결된다. 뱀의 유혹을 받고서 선악과를 따먹은 젊은 부부 아담과 하와는 ‘죄의 눈’을 뜨고서 벌거벗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하나님앞에서 서로의 죄를 지적하기 급급했다.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행위를 그대로 닮았다.
눈을 뜨게 해준 자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가? 바리새인과 맹인의 부모와 맹인 당사자는 각각 이 질문에 봉착한다. 맹인 당사자는 매우 심각했다. 자신이 겪은 일이므로 더욱 그러했다. 맹인으로서 눈을 떠서 본다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이다. 그런데, 눈을 뜨니 부작용이 더 많았다. 맹인이었을 때는 측은지심으로 보호를 받던 약자였는데, 보게 되니 바리새인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맹인의 부모까지 핍박을 받았다. 보는 것이 나은가? 못 보는 것이 나은가?
바리새인들은 요한복음 9장 24절에서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줄 아노라,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라고 말한다.
요한복음 9장은 표면적으로 맹인의 눈뜬 사건이지만, 근원적으로 ‘죄에 대한 인식의 눈’을 말하고 있다. 맹인이 눈을 뜨면서 발생한 다양한 부작용을 통해서 죄의 본질을 예리하게 풀어서 설명한다. 죄인(罪人)은 죄가 있다고 지적한 바리새인이다.
나는 30년동안 성경의 맹인이었다. 십자가의 내면을 못 봤으니, 십자가를 봉사 문고리 잡듯이 만졌을 뿐이다. 누군가 “십자가는 뱀이다”라면서 저주의 십자가로 내게 말하니 그 십자가를 버렸다. 그러다가, 정말로 우연히,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구원의 십자가를 배움으로 발견하게 되었다. 성경의 문법을 배우고, 성경의 비유를 제대로 배우고, 성경의 단어를 배우니, 비로서 십자가를 보게 되었다. 본다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을….. 내가 성경을 봄으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마치 눈뜬 맹인처럼!!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한가지다. 성경을 제대로 보면 십자가를 깨닫는 것이다. 십자가는 맹인과 정상인의 분별 기준점이다. 마치 색맹을 판단하는 색상표와 같다. 십자가를 구원의 길로 인식하면 성경에 눈을 떴고, 그렇지 못하면 성경에 눈을 뜨지 못하는 진리의 소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