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향은 동강면 대강리 평촌부락이다. 베드로의 고향은 갈릴리 벳새다 부락이다. 벳새다는 안드라와 베드로와 빌립의 고향이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켰고, 벳새다 맹인을 치료했다. 베들레헴만큼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성지(聖地)다.
마가는 어떤 복음서보다 날카로운 비수를 가졌다. 당시 시카리당이 단도(短刀)를 가지고 친로마 앞잡이를 암살했다고 하더니, 마가는 예수님의 사역을 중심으로 ‘바른 소리’, ‘선과 악’, ‘진리와 비리’, ‘공과(功過)’를 난절하게 말하고 있다. 특히, 베드로의 역할에 있어서 마가는 가장 진솔했다. 어떤 포장도 없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고 한 표현을 그대로 썼다. 마가는 베드로의 비서실장이요, 사촌동생이니, 마가의 표현은 거의 사실에 가깝다고 해야한다. 마가는 사도 바울로부터 버림을 받고, 열정이 있었으나 늘상 구석에 밀려나는 소외된 제자였다. 기회가 왔으나 번번히 그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였다. 마가복음 14장 52절에 자신을 표현하길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친 자”로 자백한다. 또한 마가는 바나바와 바울이 서로 갈라지게 한 장본인이다. 평생 그 사건은 양심의 가책이 되었으리라.
[사도행전 15장]
37.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명을 고백하고, 곧바로 ‘사탄의 앞잡이’로 전락한 사건이 나온다. 마가복음 8장에 나온다. 베드로의 고백에 앞서서, 벳새다 맹인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벳새다 맹인은 1번째 눈을 떴고, 다시 눈을 떴다. 첫 번째 눈을 뜬 것은 사람이 나무처럼 걸어다니는 것을 본다. 이것은 물질의 현상을 보는 것이다. 하늘의 태양과 만물을 보는 것이다. 태양과 만물의 너머를 보는 것이 ‘진정한 인식’이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으나, 그것은 자신의 차원에서 바라본 ‘현상적 그리스도’였고, 나중에 서서히 예수님의 진정한 사명을 깨닫게 된다.
‘본다는 것’이 모든 신앙의 핵심이다. 아담과 하와는 뱀이 차려준 선악과 밥상을 얻어먹고 자신의 죄를 깨달았다. 죄를 깨닫게 하는 음식을 먹은 것이다. 현상학적으로 죽은 것이 아니다. 살았으나 죽은 ‘신앙의 사망’에 처해진 것이다. 신앙이 살아나면, 하나님이 보인다. 생명나무를 쳐다봐야할 그들이 선악과를 먹고서 ‘죄악’만을 쳐다보니 인생은 벌거벗음이요, 두려움이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보는가? 풍랑을 쳐다보면 물속에 빠지고, 주님을 쳐다보면 수면위를 걷게 된다. 세상을 쳐다보면 세상의 권력과 광풍에 발이 빠진다. 하나님을 쳐다보면 광풍도 순풍이다. 하나님을 쳐다보면 벌거벗음도 ‘비단옷’을 입기 위해 벗겨진 것을 깨닫게 된다. 뱀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은 전혀 다르다.
이단의 성경공부를 배우면, 이단의 교주를 보도록 안경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그러한 성경경부를 배우면 이단의 교주는 ‘주님’으로 보이고, 자신은 죄인이 된다. 예수님은 전혀 그렇게 교육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발견하도록 자유의지를 허락하셨다. 성경의 극히 일부분만을 발췌해서 짜깁기한 성경공부로는 그리스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뱀은 선악과만 아담과 하와에게 줬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지 말고 모든 실과를 먹도록 허락했다. 이단들은 극히 일부분만의 성경공부로 성도들을 현혹시킨다. 성경의 모든 것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 참된 신앙길이다.
무엇이 보이는가? 이것이 핵심이다. 사춘기가 되면 남자는 여자가 보이고, 여자는 남자가 보인다. 이성의 눈을 뜬 것이다. 교실에서 당구공이 보이기 시작하면 당구의 눈을 뜬 것이다. 밥을 먹으면서 교과서가 보이기 시작하면 지식의 눈을 뜬 것이다. 성경의 눈을 뜨면, 모든 사물과 사건과 사람을 볼 때, 성경의 관점에서 보게 된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서 현빈이 게임속으로 들어갈 때, 렌즈를 착용했다. 그 렌즈가 바로 ‘바라봄의 관점’이다. 이단은 자신만의 안경을 착용하고서 성경을 본다. 반면, 예수님은 성경의 안경을 착용하고서 세상을 본다. 이것이 다르다. 구약과 신약 자체를 렌즈처럼 인삭관에 착용해야한다. 사람이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고, 성경이 사람을 읽게 해야한다. 성경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늘에 태양과 달이 있다면, 인류에게는 구약과 신약이 있다. 구약과 신약은 세상을 내다보는 두 눈과 같다.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는 ‘진리의 성령’으로 새롭게 인식하면, 세상살이가 새롭게 펼쳐진다.
[마가복음 8장]
22.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23.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26.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27.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쌔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여짜와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9.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31.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32.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33.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