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드라마 비평 / 장창훈]=황제는 왕들의 왕이다. 왕은 백성을 통치하고 다스린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인간을 만드신 후 먹거리를 주셨다. 창세기 2장에서도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만들고서 동산의 모든 나무 열매를 따먹게 하셨다. 선악과를 제외하고, 모든 열매를 허락하셨다. 자유의 에덴동산이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두려움이 몰려왔고, 두려움을 보호하려고 사람들은 권력을 만들었다. 그 권력이 오히려 사람을 지배하는 족쇄가 되고 만다.
황후의 품격을 보면, 왕다운 왕이 누구인지, 생각이 깊어진다. 이억의 비겁함에 대해서, 황후가 경종을 울려도, 이억은 어머니의 그늘을 벗어날 수가 없다. 내 인생도 30년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과 흡사하다. 야곱의 경우, 평생 가부장적 아버지 이삭의 그늘을 벗어나기가 그렇게 힘들었을 것이다. 축복기도후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그때서야 아버지 그늘을 벗어나서 새로운 곳으로 가게된다. 황제는 마마보이로서 황제다움을 갖지 못했다. 황제라면, 황제의 자격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수호하고, 사람으로서 인격을 갖춰야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로마시대~중세사회~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사람다운 사람, 황제다운 황제가 없었던 것이다.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복했을 것이다. 아구스도가 황제가 되었을 때, 헤롯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 그때 그들이 인자의 권력으로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잘했더라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실리 만무하다. 못하니까 하나님께서 아들을 직접 보내셨던 것이다. 황제가 그 모양이니, 황실이 썩은 것이다. 권력을 잡은 왕들이 썩으니, 나라가 썩은 것이다.
누가 황제인가? 누가 왕인가? 누가 그리스도인가? 그 자격은 태어난 사주팔자로 오지 않는다. 예수님은 사주팔자로 오지 않았고, 풍수지리로 오지도 않았다. 베들레헴은 얼마나 슬프고 아픈 곳인지, 유대인들에게는 다윗왕보다는 이방인의 여인 룻이 방문한 곳, 제사장의 첩이 도망쳐 베냐민 지파를 멸절시킨 슬픈 비극의 원산지로 기억된다. 예수님이 태어났던 그 시기는 식민지 치하로서, 짐승의 권력이 으르렁거릴 때였다. 구원주가 필요한 시대여서 구원주를 보내신 것이다. 모세때처럼 예수님도 그러하셨다.
누가 왕인가? 왕답게 하는 자가 왕이다. 누가 그리스도인가? 그리스도로 행하는 자가 그리스도이다. 그 삶의 인격이 자격을 증명한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고, 그 말씀대로 자신의 삶을 헌신하셨다. 그것으로 모든 것을 행하셨다. 예수님은 어떤 소유를 취하지 않으셨고, 사람들과 함께 나눔과 베품으로 평생을 사셨다. 그리스도로서 하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이었다. 권력자와 지도자가 반드시 따라야할 섬김의 권력을 보여주셨다. 하나님께서 가장 바라시는 ‘참된 권력의 형상’이다.
어떤 이단들은 ‘저주의 십자가’라고 하는데, 구원의 십자가이다. 권력의 속성을 너무 몰라서 그런 것이다. 돈과 권력은 설탕과 같아서 먹으면 먹을수록 단체가 망조로 흐른다. 정말로 조심해야한다. 황후의 품격에서 공주가 황태녀로 책봉되는 것을 원하지만, 어린아이가 황태녀가 무엇인지도 모르고서 바라는 것과 같다. 진정한 권력은 인자의 권력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중세사회 교황의 권력이 짐승의 권력과 같았다. 무늬만 종교로 포장되었을 뿐, 로마황제의 권력이나 교황청의 권력이나 모두 짐승의 권력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권력을 싫어하고 증오한다. 영원한 복음이라는 예언서에서 다니엘의 미운 물건을 황금사원(바위돔)으로 지목하면서 688년을 기점으로 삼았는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종교권력, 정치권력, 경제권력 등을 모두 우상처럼 경멸한다.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모든 것이 우상숭배다. 하나님께는 창세기의 옛뱀이 미운물건이었다. 그 뱀을 예수님께서 잡았으니, 말세는 끝난 것이다. 이후에는 뱀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혔을 뿐, 하나님이 이미 승리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