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신앙의 선조들은 예수님의 성함을 놓고 성령의 은혜를 받았던 것 같다. 본래 한자는 한자명 그대로 부르는데, 야소(耶蘇)가 예수님의 한자이름인데, 조선시대는 ‘야소’로 호칭했다. 기독교는 ‘야소교’라고 불렀다. 예수교는 야소교다. 그런데, 야소를 ‘예수’로 불렀으니, 이름이 너무 아름답다. 영어로 ‘예스’로도 느껴지면서, “예”와 “수”가 합쳐져서, 부르면 부를수록 정감이 간다. “예수”는 정말로 누가 개명했을까?
중랑천을 뛰면서, 힘이 차오른다. 너무 심한 운동은 좋지 않지만, 너무 적은 운동은 더 안 좋다. 하루에 달음박질은 반드시 필요하다. 발바닥의 뛰기운동은 심장이 달리게 한다. 혈액이 돌아야, 혈관의 노폐물이 청소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하늘을 올려보니, 멀리 나무 꼭대기에 까치가 있다. 아!! 까치다.
나의 고향은 정감있어서, 감나무 끝에 홍시를 5~6개 남겨둔다. 까치밥이다. 장대가 올라가지 못한 탓도 있겠으나, 까치도 겨울을 살아야하니, 어르신들은 ‘까치밥’을 남겨두신다. 그런데, 까치가 와서 홍시를 먹는다. 남겨진 것은 희망의 까치를 불러온다. 이사야는 그러한 까치밥을 ‘그루터기의 거룩한 씨’로 비유했다. 도대체, 이사야의 상상력은 창공을 날아간다.
무성한 나무의 가장 먼 가지에 네다섯 개가 남음 같으리라 (이사야 17:6)
인생의 무성한 청춘의 가장 먼 가지 끝에는 ‘4~5개의 홍시’가 남아진다. 나는 결혼의 가족이 없다보니, 더더욱 몇몇으로 귀결된다. 30년 종교에 몰빵을 하다보니, 그곳을 떠남으로 그곳의 분깃도 사라졌고, 인맥도 끊어졌다. 내가 사는 집 서랍에는 평생 언론인으로 모은 명함이 1만장 들어있다. 아!! 그 중에 내 마음으로 담긴 사람이 몇몇인가. 결국, 네다섯 개 남음처럼 인생의 인맥도 그런 것 같다.
인생은 먼 가지 끝에서 네다섯 개가 반드시 남아야한다. 네다섯 달란트를 반드시 남겨야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운동하고, 성경읽고, 기도하고, 저녁을 살아가고, 칼럼을 쓰고, 하루를 마감한다. 교회 목사님이 카톡으로 내 신앙을 오늘도 양육해주셨다. 기도하면서, 내 신앙이 좌초되지 않게 돌보아 주신 분들의 고마움을 하나님께 말씀드렸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예수님이 믿어지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이사야를 ‘이사야서 11장 이상세계’로만 알고 있었다. “동물천국은 사람천국이다”로 비유해서, 창세기 49장과 연결한 비유해석이 각인되었다. 그런데, 언젠가 목사님이 “웃시야 왕이 범죄한 성전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봤다”라고 설교를 하시는데, 이사야 선지자가 ‘성경의 성전’속에서 벌떡 일어서는 느낌이었다. 그때 그설교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때 그설교로 나는 이사야서가 무척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