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예수님은 누구시길래, 내 마음을 자꾸만 잡아당기실까? 인식의 옷깃을 당기시며, 내 고개를 저편으로 돌려보라고 하시니…. 내가 알던 편견의 방향에서 고개를 돌리면, 예수님이 새롭게 보인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내게 좋은 책을 알려주셨다. 그 책을 보니, 예수님이 다시 보였다. 내가 너무 많이 오해했구나…. 책 제목은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다.
해당 도서는 단행본으로 총 32챕터로 구성된다. 소제목 32개다. 오늘은 3월 25일 첫 번째 챕터를 읽었다. 예수의 탄생 이야기다. 누가복음 2:1~20이다. 뭐랄까, 내 마음속에 성경이 걸어서 들어온 그런 느낌? 내가 오랫동안 외면했던 궁극의 질문을 곧바로 노출한다. 정말로 궁금했던 질문을 꺼내놓고, 작가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관 사건’이다.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누가복음 2:7_개역개정)
드디어 첫아들을 낳았다. 여관에는 그들이 머무를 방이 없었기 때문에 아기는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에 눕혔다. (공동번역)
마리아가 첫 아들을 낳아서,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혀 두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 (새번역)
여관에는 사람이 다 차서 있을 곳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마굿간에 머물게 되었다. 거기서 마리아는 첫아들을 낳아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현대인의 성경)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개역한글)
“머물 곳이 없어서, 마굿관에서 태어나 말구유에 눕히신 불쌍한 예수님”의 이미지가 매우 강하다. 가난한 자를 위한 누가복음이 초반부에 과연 그렇게 편집했을까? 착오는 어디서 발생한 것일까? 당시 사회적으로 배척당한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나 구세주의 탄생을 알려주는 사건은 경이롭다. 그런데, 예수님이 머물던 곳이 마굿간이라니….. 마태복음에 나오는 헤롯의 유아 학살사건보다 수위는 낮지만, 고향 사람들의 냉정함과 푸대접은 누가복음과 어울리지 않는다. 정든 고향에서 예수님이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을까? 한국인이 생각하는 그런 외양간에서 태어났을까?
‘마굿간’은 우리가 떠올리는 단어이다. 현대인의 성경은 ‘마굿간’이라고 새로운 단어를 기록했다. 그러나, 누가의 기록에는 ‘마굿간’이 없다. 누가는 마굿간을 말하지 않았는데, 왜 우리는 ‘마굿간’을 떠올릴까? ‘구유’ 때문에 그렇다. 구유에 누였으니, 마굿간에서 잤다라고 우리는 그렇게 결론내렸다.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책에서 작가는 여관으로 번역된 단어에 주목한다. 누가는 그리스어로 ‘katalyma’를 썼는데, 이 단어는 ‘머무는 곳’의 통칭이다. 숙박업소의 개념은 아니다. katalyma 단어는 누가복음 22장에 다시 등장하는데, 유월절 음식을 먹을 객실을 찾을 때 사용된다. 마가의 다락방이 객실이다. 손님을 위한 객실(客室)을 여관으로 잘못 오역하면서, 구유는 더러운 마굿간으로 확장됐다. 유월절을 드신 곳이 여관이 아니듯,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도 마굿간이 아니다.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책 p53 사진 인용
집 가(家)는 돼지 시(豕)가 들어있다. 어떤 사람은 이 글자를 보고서 ‘돼지집’으로 해석한다. 아니다. 아주 옛날에는 돼지를 집에서 같이 키웠다. 돼지가 매우 귀한 재산이었고, 뱀의 천적이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생활문화가 그대로 문자의 화석으로 남겨진 글자가 家이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돼지가 개로 바뀌었다. 이처럼, 예수님 시대에도 동물은 집안에서 키웠다. 집안에 있어야 안심이 되고, 동물덕분에 온기가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다. 현대인들의 사고로 2천년전에 기록된 사건을 상상하면 엉뚱한 결론에 다다른다. 2천년전 요셉과 마리아가 머무른 어떤 집의 구조를 생각해야, 그날의 진실을 알 수 있다.
그 집은 여관이 아니고, 객실이 하나 있는 평범한 집이다. 구유는 큰 방에 놓여져서, 집안에 있는 가축의 우리쪽에 놓였다. 가축도 가족으로 여기면서 살았던 그 시대 백성들의 삶을 생각하면, ‘구유에 놓인 예수님’에서 새로운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은 구유에 놓였고, 그 구유는 큰방에 놓였다. 요셉과 마리아는 객실에 다른 손님이 있어서 주인이 거주하는 방에 함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출산을 하자, 구유를 깨끗하게 닦은 다음에 그곳에 짚을 깔고, 강보에 싸서 둔 것이다. 이것은 백성과 친구와 고향의 가장 아름다운 환대다. 이보다 아름다운 사랑이 어디에 있을까?
객실을 여관으로, 구유를 마굿간으로 잘못 오해하면서 우리는 그날 요셉과 마리아에게 베푼 환대를 ‘멸시와 천대’로 판단하고 있다. 정반대 결론에 다다른 것이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종종 정반대로 이해할 때가 많다. 그래서, 사람은 성령을 간구하고, 성경의 본문을 깊게 들여다보고, 성경의 원본을 원본으로 알려주는 좋은 책을 읽으면서, 겸손하게 살아야한다.
첫 챕터를 읽고서, 누가의 편집의도를 생각해봤다. 누가가 의도했든, 아니든, 누가를 통해서 그 당시 독자들은 예수님을 로마의 창시자와 비교해서 생각했을 것이다. 누가복음 2장 1절에 로마의 황제가 직접 거론되고, 로마를 세운 쌍둥이 형제 레무스와 로물루스는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 그런데, 예수님은 태어나면서 구유에 뉘였고, 목자들이 찬양했다. 누가가 쓴 ‘구유’는 멸시와 천대가 아니고, 가장 아름다운 배려요, 따뜻함이요, 낮은 곳에 위치하는 안식처이다. 구유가 있던 곳이 주인집 안방임을 우리는 기억해야한다. 최소한 ‘더러운 마굿간’에서 예수님이 태어난 것이 아님을 알아야한다.
아!! 예수님이 누구시길래, 나를 이렇게 흔들어놓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