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5월 9일 누가복음 9장을 읽었다. 12사도 파송과 오병이어와 베드로 고백과 변화산상과 권력암투 등이 나온다. 영접(迎接)이란 단어가 매우 중요하게 사용된다. 영접(迎接)은 맞이하여 사귀는 것이다.
예수님은 무전여행(無錢旅行)처럼 전도여행을 보내셨다. 지팡이, 배낭, 양식, 돈, 옷을 갖지 않고 가게 하셨다. 지갑없이, 전단지도 없이, 식사비와 숙박비도 없이 각 마을로 가게 하신 것이다. 대신,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셨다. 찾아가는 ‘의료 서비스와 성전 서비스’를 한 것이다. 배수진을 친 결과, 반응은 즉각적이다. 헤롯왕까지 자신이 세례요한을 죽인 범죄를 자각하게 된다. 사도들이 모두 돌아와 보고를 하니, 그림자처럼 백성이 모두 몰려왔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라고 했다. 영접은 서로 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9장에는 영접이란 단어가 총 6번 나온다. 12사도 파송때 1번, 무리가 몰려왔을 때 1번, 그리고 제자들끼리 누가 높은지 싸울 때 4번이나 나온다. 영접(迎接)은 낮아지는 것이다. 제자들끼리 “누가 크냐”로 변론이 일어났다. 그것을 알고서 예수님이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옆에 세우셨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라고 말씀하신다. “너희 모든 사람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고 결론을 내셨다. “권력의지가 없는 자가 가장 큰 권력을 가졌다”는 역설적 표현이다. 인자의 권력은 섬김과 영접의 사명이다.
마가복음에서는 배경설정이 약간 다르다.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라고 했다. 어린아이가 갓난 아이는 아니지만, 아주 작은 아이로 연상된다.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서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937)고 했다. 마가복음에서는 영접(迎接)이 5번이나 사용된다. 사도들끼리 서로 영접하면서 용서하면서 받아드리면서 인정하면서 높여주면서 그렇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높이면서 안으셨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중에 사마리아 마을을 지나는데,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를 어떤 마을이 영접하지 않는다. (눅10:51~56) 그때 성질급한 야고보와 요한이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한다. 예수님이 허락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 정도로 냉혹한 거절을 당했던 것 같다. 어떤 고대사본에는 55절 끝에 “저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모르는구나.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망시키러 온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왔노라”가 있다. 영접 대신 거절이 와도, 이해하고, 예수님처럼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를 하면 된다.
영(迎)은 卯와 辶의 합성이다. 두 문(卯)을 열고서 나가서(辶) 맞이하는 것이다. 문을 열 듯, 마음을 열고, 포용과 포옹과 사랑과 용납하는 것이다. 접(接)은 手과 妾(첩)의 합성이다. 妾은 立과 女인데, 立은 辛의 변형이다. 妾은 죄지은 여자로서, 이마에 辛이 새겨진 여자종이다. 奴와 같다. 사귈 접(接)은 종처럼, 첩처럼 낮아져서 섬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