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여행자는 밤새 병간호를 했을 것이다
몸살감기는 핵무기보다 무섭다. 군대에 다시 다녀온 듯, 기합받듯, 하루종일 뉴캐슬병에 걸린 졸린 닭처럼 헤맨다. 위안은 역시 성경말씀이다. 성경은 성령의 손길이 되어 내 마음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5월 10일 누가복음 10장에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나온다. 아!! 나는 이 비유만 보면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인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로 설정한 예수님의 비유는 무엇을 말씀하고 싶은 것일까? 제사장의 집이 여리고에 있었던 것 같은데, 멀리서 버려진 자를 만났다. 얼마나 놀랬을까? 그 제사장은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피할 길로 갔을 것이다. 레위인은 버려진 자에게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 레위인도 분명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갔을 것이다. 피하고, 외면하면서 누구나 자신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어떤 사라미아 사람은 가는 길에 본 것이 아니다. 여행하다가 본 것이다. 버려진 누군가를 봤다.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을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심폐소생술을 했을 수도 있고, 구급상자를 열어서 후시딘을 바르고, 인공호흡도 했을 수도 있다. 입고 있던 겉옷도 벗어서 입혀주었을 것이다. 자기 짐승에 환자를 태웠으니, 그 여행자는 걸어서 짐승을 끌었을 것이다.
숙박비 계산은 체크 아웃 제도였던 것 같다. 다음날 여행자는 그 주막에 또 가서 두 데나리온을 지불한다. 대략 20만원 비용이니, 식사와 여관비용을 합쳐서 어느 기간을 선불로 지불했나보다. 추가 비용이 발생하면, 돌아올 때 갚아주겠다고 약속했다. 내용을 보면, 강도만난 자를 구제하고, 다음날 다시 주막에 간 것 같지만, 같이 머물면서 병간호를 했을 확률이 높다. ‘돌보아 주었다’는 표현이 병간호다.
그 여행자도 어디선가 잠을 자야한다. 강도만난 자의 생명을 건져주고, 모든 일처리를 완벽하게 마친 후에, 추가 비용이 발생하면 그것도 갚겠다고 약속하고 떠나는 어떤 사마리아 여행자의 온유한 인품은 성령의 숨결이다. 아파보니, 역시 교회는 주막같아야 하고, 상처를 품어야 하고, 따뜻해야한다.
언젠가 토요일에 입술이 갈라지면서 피곤증이 급습했다. 주일에 교회에 갔더니, 내 입술의 피곤함을 목회자가 살피고서, 내 이름을 부르시더니, 가까이 갔다. 내 입술의 미세한 상처에 바를 연고를 주시고, 상처를 치료해주신다. 그 손길이 자주 기억에 남는다.
또, 20년 전에 내가 많이 배가 고팠는데, IMF 때문에 힘들었는데, 그때 어떤 분이 내게 차비를 챙겨주셨다. 차비가 없던 때도 있었다. “누나 저 차비 좀 줘요”라고 했는데, 그때 그 분은 나와 많이 친하지 않았는데 나의 불쾌한 부탁도 긍휼함으로 들어주셨다. 그 사건도 자주 기억에 남는다. 나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겨주신 소중한 사람들이 있어서 지금의 장창훈이 존재할 것이다. 모두 성령의 손길이다.
강도 만난 자는 분명 여관에 도착해서 깨어났을 것이며, 하룻밤 병간호를 받으면서 두 사람은 오랜 기간 인연을 맺으면서 ‘진정한 친구’가 되었을 것이다. 친구로서 이웃이 된 결정적 사건은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酒幕)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준 것이다. 나의 평생에 살아가면서, 여유가 있게 되면 사마리아 여행자처럼 주막인생을 살아야겠다. 따뜻하게 품어주고, 상처를 치료하고, 사람이 사람과 어우러지는 그런 긍휼의 주막(主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