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는 가슴이 설레이고, 감동의 여운이 맴돈다. 왜 그럴까? 뻔히 결말이 정해진 역사 드라마를 보는데, 왜 땀이 흠뻑 젖을까? 답을 알고서 보는데도 흥미진진한 이유는 연출된 시나리오 덕분이다. 역사는 곧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과 같다. 우리는 역사 드라마의 틀속에서 현실을 재조명할 뿐이다. 작가와 PD는 역사적 사실을 주제로 지금 시대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화법은 간접화법이다. 녹두꽃의 초반은 촛불혁명을 연상시키는 ‘횃불’이 서두에 전개되었고, 조병갑은 권력자를 상징했다.
역사는 과거이니, 시간의 황혼이요, 마침표다. 그런데, 인생은 황혼을 향한다. ‘황혼의 과거’는 이중성이다. 하나는 도착점, 다른 하나는 출발점이다. 과거는 모든 인생의 출발점이다. 나의 과거는 1972년 12월 23일 어느 겨울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 대강리 평촌부락 644번지에서 시작됐다. 나는 과거의 황혼을 돌아보면, 지난 48년이 아득하게 보인다. 그런데, 남은 여생이 황혼처럼 지고 있다. 황혼은 과거요, 미래다.
우리는 아침해를 본다. 그러나, 저녁을 곧 맞이한다. 시간의 흐름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흐른다. 그렇다면, 저녁이 곧 미래가 될 것이다. 우리는 황혼의 저녁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보는 것이다. 역사는 곧 미래를 비추는 거울인 셈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결코 절단될 수 없는 쇠사슬로 묶여져 있다. “오늘”로 명명되는 모든 달력의 시간들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시간은 연결된 체계임에 분명하다.
나는 역사적 사실을 의미있게 자주 고찰한다. 성경을 그렇게 하고, 한국사와 세계사와 기독교사를 자주 탐독한다. 황혼으로 이미 끝난 과거이지만, 언젠가 돌아갈 나의 황혼을 쳐다보듯, 과거 사실속에서 빛을 발견하는 심정으로 돌아보는 것이다. 지금은 저녁 7시 7분, 오늘도 이렇게 저녁을 향한다.
역사는 자연이 아니다. 역사는 인간의 지성(知性)에 근거한다. 인간의 의식을 하면서 역사가 기술된다. ‘의식’은 곧 살아있는 사람들의 사유체계다.
그래서, 역사는 현재 살아있는 사람의 소유라고 정의된다. 과거에 있던 모든 사실들은 현재 살아있는 사람들의 의식체계를 통해서 재현되는 것이다.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역사적 모든 사실과 사건은 단지 자연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래서, 역사와 역사가는 현재에 위치한다. 역사를 배우는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정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