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를 자세히 읽으면서 독서습관이 많이 달라졌다. 전에는 안보이는 것들이 서서히 보이고, 보이는 것들이 멀어진다. 평범한 문장이 파도처럼 출렁일 때도 있고, ‘매우’라는 작은 부사가 빨간 신호등처럼 나를 멈칫 할 때도 있다. 느린 속도로 서서히 성경을 읽는 습관은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이다.
복음서 곳곳에 관점의 이동이 많이 나타난다. 마태복음 17장 24~27까지 나오는 ‘베드로와 물고기’가 대표적인 장면인데, 관점이 완전히 바뀐다. 세금 받는 자가 예수님의 독촉 고지서를 내밀자, 베드로가 집에 들어간다. 들어가서 예수님의 의견을 들어보니, 예수님은 면제대상이다. 왕의 아들에게 세금을 받으러 온 것이다. 오해하지 않도록, 베드로에게 낚시를 해서 세금을 대신 내도록 한다. 관점이 3번 변경됐다.
세금 징수원 입장에서 예수님은 세금 미납자다. 반세겔을 반드시 내야하는데 못 낸 것이다. 그런데, 집에 들어가니, 예수님의 관점은 달랐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 면제대상인 것이다. 그리고, 오해하지 않도록 예수님은 세금을 내도록 하는데, 베드로에게 대신 내게 한다. ‘낚시’라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성경해석자들 사이에서는 ‘낚시’의 비유를 놓고 왈가불가 다양한 의견을 내놓는다.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지인에게 부탁할 수도 있고, 직접 낚시를 했을 수도 있다. 어떤 것이든, 반세겔을 해결했을 것이다. 또는 베드로가 세금 징수원에게 “1주일만 말미를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이 발생했다. 다양한 상상이 가능하다. 답은 없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낚시와 물고기’에 초점을 맞출 필요는 전혀 없다. 이 사건을 기록한 목적이 중요한 것이다. (창세기의 생명나무와 선악과는 그 비유해석이 중요하지만, 해당 사건에서는 물고기의 비유해석이 전체맥락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누가복음 18장 35~43절에서도 관점의 이동이 발생한다. 예수님이 여리고로 들어가고 계셨다. 여리고 마을잔치에 귀빈으로 초대를 받으신 것이다. 그때 동네 어귀에 바디매오라는 맹인 거지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지나간다고 하니,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목소리를 높이자, 마을 주민들이 꾸짖으며 잠잠하게 한다. 귀빈으로 모시는 예수님을 불편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때, 예수님이 맹인 거지를 오라고 하신다.
예수님이 맹인 거지를 오라고 하는 그 순간 관점의 이동이 발생한다. 분명, 여리고로 들어가는 마을잔치에 예수님이 귀빈으로 초대를 받은 것인데, 예수님이 멈춰서 맹인 거지를 오라고 하니, 이제는 예수님의 잔치가 된 것이고, 맹인거지가 귀빈이 된다. 이렇게 완벽한 액자형 관점이동이 있을 수 있는가? 청중은 맹인 거지를 데리고 온다.
성경은 관점이동의 천국이라고 할 수 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의 판결도 관점이동이 극명하다. 의로운 바리새인과 불의한 세리의 기도 사건도 관점이동이 발생한다. 성경앞에서 마음이 겸허해진다. 내가 성경을 안다고 해도, 그것은 내가 아는 그 수준에 불과함을, 받아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