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눅22:15)
유월절(목)이 되자,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서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께 묻자, 매우 상세하게 방법을 알려주신다. 마가의 다락방(?)으로 알려진 그곳에서 유월절 식사를 하셨다. ‘원하고 원하였노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깊은 애정이 마음이 스민다. 믿는 성도는 성만찬을 기념하면서 그때를 회상하지만, 성경 텍스트는 모든 감정을 배제하고 문자로 현재형을 만들었지만, 성만찬이 있었던 역사의 그 순간에 예수님은 얼마나 슬펐을까? 감정의 격랑은 겟세마네 동산 기도에서 드러난다.
가룟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니라”에서 나오듯, 세상이 기뻐하는 일에 가룟 유다는 동참했다. 시험에 들지 않게, 마음을 지켜달라고, 하나님께 날마다 간절히 기도하고 기도해야한다. 사람은 스스로 마음을 지킬 수가 없다. 마음은 돈과 같다. 돈은 은행에 맡겨서 지킨다. 혹은 비밀금고에 넣는다. 그처럼 마음은 하나님께 맡겨야 지켜진다. 기도와 찬송으로 마음을 하나님께 맡겨야,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지키심으로, 마귀가 마음속에 침입하지 못한다.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기도 하시고
예수님도 성만찬에서 잔을 받으셨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잔을 제자들에게 주시는 것만 나오는데,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이 먼저 잔을 받으시고, 제자들에게 서로 나누라고 말씀하신다. 와인을 잔에 따라서 나누듯, 그렇게 했을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성만찬 장면이 없다. 몇 번 찾아봤는데, 세족식만 있고, 성만찬은 없다. 오히려 가룟유다에게 떡을 줬는데 마귀가 들어갔다는 내용만 나온다. 이렇게 정반대로 기록할 수 있을까? 관점이 정말로 정반대인 것 같다. 사건의 진실을 알려면, 한겨레 신문과 조선일보(진보와 보수)를 모두 구입해서 꼼꼼히 읽어봐야 윤곽이 수면위로 떠오른다. 그렇듯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은 서로 비교하면서 읽을 때, 사건의 내막이 수면위로 떠오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