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은 예수님을 ‘태초의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증거한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 말씀이 ‘독생하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품속에 계시던 그 독생자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는데, 그가 예수님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낳은 것이다. “품속”은 “영접”과 “믿음”으로 연결된다.(요1:12)
예수님은 태초의 하나님을 이 땅에 나타내셨고,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에 ‘증거함으로’ 나타냈다. 세례요한의 증거를 받고, 제자 둘이 예수님을 따랐다. 안드레와 사도 요한이다. 안드레는 친형 베드로와 빌립을 전도했고, 빌립은 나다나엘을 전도했다. 예수님의 핵심 제자들이 세례요한에서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스승이라도 버려야한다. 안드레와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은 세례요한을 버렸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따르고, 세례요한도 따르고’를 동시에 할 수는 없다. 짜장면도 먹고, 짬뽕도 먹는 “짜짬”의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지만, 동시에 2개는 불가능하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듯,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듯, 옛 스승을 벗어나야한다. 결국 가야할 곳은 ‘태초의 하나님’이다.
안드레가 자신의 스승 세례요한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성령께서 믿음으로 보여주시니, 바꾼 것이다. 성령의 관점에서 보면 벗어날 수 있고, 자신의 관점에서 보면 벗어날 수 없다. 이스라엘은 430년간 이집트에 정착했다. 전통과 역사가 깃든 이집트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서 그렇다. 말씀이 임하면, 믿음이 생기고 하나님의 관점이 생긴다. 말씀이 주어져도, 말씀을 믿지 못하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수 없으니, 이집트를 벗어날 수 없다.
세상에는 많은 기독교 교파가 있다. 어디가 진짜인가? 예수님은 하나님을 근본으로 보이셨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이 어떠한지, 그것을 정확히 알아야한다. 태초에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하셨듯, 하나님은 ‘독생하신 하나님’을 이 땅에 예수님으로 보이셨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행하심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이며, 예수님의 행하심은 신약이다. 이것으로 분별의 기준을 삼고서 진리를 분별해야한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와서 보라”고 했다. 직접 봐야한다. 직접 말씀을 들어야하고, 직접 체험해야한다. 볼 때, 들을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셔야 볼 수 있다. 세례요한에게도 하나님께서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고 하셨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리는 것을 하나님이 눈을 열어서 보여주니, 세례요한도 본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절대로 못 본다. 청와대에 가더라도, 대통령이 허락하지 않으면 대통령을 만날 수 없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예수님이 ‘죄인’으로 보이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독생자 하나님’으로 보인다. 1장 51절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했다. 야곱이 본 하늘의 사다리를 의미한다. 예수님이 참 이스라엘이다. (창2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