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전지적 작가시점과 관찰자 시점으로 읽으면 안되고, 오직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읽어야한다. 각 인물은 ‘나’에 해당된다. 각 인물이 ‘너’가 되면, 관찰자 시점이다. 말씀이 바로 자신에게 해당되어야한다. “비판하지 말라. 들보를 먼저 빼라”고 할 때, 머릿속에서 ‘제3의 인물’이 떠오르거나, 어떤 국회의원과 정치인이 떠오른다면, 성경읽기에 실패한 것이다. 자신의 언어습관과 폐단이 생각나야한다. 성경을 읽을수록 “이것은 누구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되면, 그것은 머릿속에 여전히 가시덤불이 가득찬 것이다. 모두 자기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다.
성경에는 인물이 2명밖에 없다. 1명은 자신, 다른 1분은 하나님이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말해주는 구원의 책이 성경이다.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 믿음으로 얻은 이삭!! 모리아 산에서 죽었다가 살아난 이삭!! 그 이삭을 벗어나서 광야로 내쫒긴 야곱에게 하나님이 나타났다. 성경에 무수한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오직 하나님과 나에 대한 이야기다. 또는 예수님과 나에 대한 이야기다.
[마25: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주님을 맞았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교회에 다니는 자신, 십자가 복음이 믿어지는 자신에게 감사해야한다.
[마25:11~12]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이 사건을 읽으면서, 남의 일로 생각하면 성경읽기에 실패한 것이다. 이 사건에서도 “남은 처녀들”에 “자신”을 포함시켜야한다. 예수님이 자신의 이름을 모른다고 부인할 수도 있다. 그 이유를 찾아야한다. 그때 비로소 준비하지 못한 기름이 무엇인지 깨달아질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읽는 것이다.
[마태복음 24]
32.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예수님은 양과 염소를 각각 구분하고, 각각 축복과 심판의 말씀을 하셨다. 읽는 성도는 “나는 양일까, 염소일까”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양의 입장, 염소의 입장에 모두 해당될 수 있다. 성경읽기는 오직 ‘하나님과 나’외에는 없다.
이사야서는 6장이 맨 앞에 나와야한다. 6장 1절이 1장 1절이 되야한다.
[이사야 6: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하나님을 본 이사야는 바짝 엎드렸다. 그리고 입술의 죄를 자복했다. 입에 발린 기도가 아니다. 입술로 지은 범죄가 생각난 것이다. 그때 천사가 그 입술을 숯불로 지졌다. 이사야는 말씀을 외치는 선지자이고, 입술은 예루살렘 성전처럼 가장 중요한 신체기관이다. 그곳을 숯불로 지진 것이다. 이것은 입술에 대한 재앙이다. 예루살렘에 임한 재앙이 이사야의 입술에도 임했다. 그리고 죄가 사해졌다. 성경읽기도 이사야가 하나님앞에서 입술의 범죄를 자복하듯이 자신부터 적용해서 읽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