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66장]
15.보라 여호와께서 불에 옹위되어 강림하시리니 그 수레들은 회리바람 같으리로다 그가 혁혁한 위세로 노를 베푸시며 맹렬한 화염으로 견책하실 것이라
16.여호와께서 불과 칼로 모든 혈육에게 심판을 베푸신즉 여호와께 살륙 당할 자가 많으리니
[창세기 22:6] 아브라함이 번제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심판주로서 하나님은 양손에 불과 칼을 들고 불에 옹위되어 강림하신다. 작은 심판주로서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렸다. 이삭은 나무에 메달리기 전까지 전혀 몰랐다. 아버지와 아들의 생각이 완전히 달랐다. 이삭은 자기가 죽을 번제나무를 짊어졌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짊어졌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셨다. 요한복음은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장면은 없고, 오히려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신다. 가룟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겟세마네 동산에 왔을 때다.
많은 이단들은 ‘십자가 사건’에서 흠을 잡는다. 마치, 뱀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그 말씀에 흠을 잡으면서,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속였다. 하나님과 하와의 관계를 틀어서 멀어지게 하려는 뱀의 거짓말이다. 십자가의 구원을 트집잡는 이단의 교리는 결국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고, 예수님의 자리를 교주가 대체한다.
십자가는 성경의 ‘복선과 신비’에 따라 밭에 감춰진 보화처럼, 은밀하게 행하신 창조주 본인의 완벽한 작품이다. 인간이 실수해서, 제자들의 군사력이 부족해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것이 절대 아니다. 십자가 사건은 이삭의 번제사건과 같다. 이스마엘과 이삭이 다른 것은 ‘약속과 번제’다.
이삭은 할례를 받은 후에 번제나무로서 죽음의 할례까지 받았다. 그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의 피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예언을 완벽히 성취한 창조주의 뜻이다. 창조주는 심판주로서 법을 벗어나서 이 땅에 은밀히 내려와서, 사람의 형상을입고서 사람으로 죽임을 당하셨다. 이것을 믿어야 구원이 이뤄진다. 믿어지지 않는 것은 성령께서 믿음을 주지 않으셨거나, 새가 그 믿음의 씨앗을 쪼아 먹어서 그렇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죽이려고 모리아산에 데려갔듯이,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십자가로 죽여서 어린양으로 삼기 위해서 보내신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밭에 깊게 묻힌 십자가의 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