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6월 4일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의 챕터 4 – ‘헤롯의 잔학행위’를 읽었다. 마태복음 2:13~18에 대한 신학자 베일리의 성경 칼럼이다. 베일리는 묻는다. “왜 마태는 예수님 탄생에 헤롯의 유아 대학살 사건을 기록했을까”라고. 이런 저돌적인 질문은 나를 휘청거리게 했다. 사람들은 마태가 가르키는 ‘헤롯의 유아 대학살’을 본다면, 베일리는 ‘헤롯의 유아 대학살’이 가르키는 방향을 보게 한다. 마태는 왜 그랬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마태는 이 사건을 지목하며 예레미아 31:15의 예언성취로 풀이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 때문에 죄없는 아이들이 희생당했다. 헤롯왕은 순결한 아이들을 죽인 것이다. 탄생때는 예수님 때문에 죄없는 아이들이 희생제물이 되었다. 그처럼 십자가 죽음은 죄없는 예수님이 희생양이 되신 것이다. 마태는 시작과 끝에 절묘한 편집을 통해서 십자가 죽음의 ‘이신칭의 어린양’을 증거하고 있다.
이 세상에는 자신이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댓가를 받는 경우가 많다. 일한 댓가대로 주어지는 세계가 아니다. 인과응보로 이해될 수 없는 인생사다. 그처럼 십자가 사건도 보여지는 판결로 모든 진실을 알 수 없다. 예수님 때문에 아이들이 죽었으나, 예수님조차 죄가 없었다. 헤롯왕의 권력의지가 가시덤불이 되어서 겨자씨와 같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이다. 죄는 그렇게 무섭다. 진리의 말씀을 들어도, 권력의지와 명예욕과 물질의 탐욕이 마음에 가득하면, 자신도 모르는 무지로 예수님의 순결한 사랑을 죽이고 있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