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6월 5일 요한복음 5장을 읽었다. 베데스다 연못 사건이 나온다. ‘은혜와 자비의 집’을 뜻하는 베데스다에는 하나님의 자비를 염원하는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있었다. 꽤 유명한 요양원처럼 운영된 듯 하다. 38년이나 그곳에 소속된 앉은 뱅이가 있었는데, 38년이나 치료가 안 된 것이다. 이것은 누구 책임인가? 앉은 뱅이는 “다른 사람들이 먼저 내려갔다”고 이유를 설명한다. 1등을 해야만, 은혜를 받는 베데스다 연못이었다. 무늬만 은혜일 뿐, 실제는 조건 댓가다.
38년된 앉은 뱅이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 제일 먼저 도착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그 앉은 뱅이에게 갔던 것이며, 예수님이 긍휼과 자비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말씀을 주셨기 때문이다. 말씀이 곧 빛이다. 말씀을 하시지 않으면, 어둠은 계속 어둠이다. 어둠이 충만하면, 만물도 어둡다. 그 병자는 어둠속에 갇혔으나, 주님이 긍휼과 자비로 말씀의 은혜를 주시니, 병이 치료된 것이다.
요한복음 5장은 3가지로 구성된다. ① 베데스다 표적 사건 ② 생명과 심판의 부활 설교 ③ 예수님을 증거하는 두 증인이다. 예수님은 38년된 병자와 어떤 친분이 없었다. 38년 개근한 것을 보고 그를 치유한 것이 아니며, 믿음도 없었다. 그는 치료받고도 누가 치료했는지 알지 못했다. 순식간에 치료가 된 것이다. 하나님이 행하시면, 겨자씨같은 시간에도 역전 만루홈런이 일어난다. 하나님은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병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 병을 치료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출현을 입증하기 위한 ‘증거의 사건’으로 삼기 위함이다.
5장 36에서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아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고 하셨다. 여기서 역사(役事)는 행하신 일을 뜻한다.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그 일이 예수님을 증거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참된 베데스다임을 말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요, 죄를 사하시는 구원의 선물이다.
예수님은 1장에서 5장까지 계속 같은 일을 반복하셨다. 세례요한, 성전 대청소, 니고데모 정치인, 사마리아 여인, 베데스다 앉은 뱅이 등을 통해서 ‘예수님의 존재’를 말씀하신다. 세례요한을 만났을 때는 ‘빛’을 말씀하신다. 왜냐면, 세례요한이 ‘등불 역할’을 했다. 제사장들을 만났을 때는 ‘성전’을 말씀하신다. 니고데모를 만났을 때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신다. 정치인은 국가의 번영을 꿈꾸므로. 야곱의 우물에 물을 뜨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물’ 이야기를 하신다. 베데스다 연못에서는 ‘베데스다 이야기’를 하신다.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은 하나님을 보여주는 ‘표지’다. 즉, 모르스 부호와 같다.

모르스 부호처럼 전등이 밤마다 깜빡이지만, 대저택의 여주인은 고장난 전등으로만 생각한다.
“아들아!!”
영화 기생충에서 송강호가 평창동 대저택에 감추인 ‘깊은 지하실’ 방에서 모르스 부호를 보냈다. 대저택의 전등이 깜빡깜빡한다. 그것을 알아본 사람은 오로지 송강호의 아들이다. 눈내리는 어느날, 삼각산에 올라서 망원경으로 살펴보다가 규칙적 반복을 거듭하는 전등의 반복횟수를 기록하면서, 모르스 부호임을 믿게 된다. 성전, 베데스다, 야곱의 우물 등등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을 알려주는 ‘모르스 부호’이다. 영화 기생충은 무엇을 말하는 모르스 부호일까? 깜빡깜빡하는 전등일지라도, 세례요한이 잠시 즐거워하는 등불이듯, 등불이 꺼지면 참된 빛이 떠오를 것이다. 베데스다 연못이 무색하게, 예수님은 직접 내려와서 38년동안 베데스다가 못한 그 일을 직접 행하셨다. 성전이 못한 ‘죄사함의 은혜’를 직접 베푸셨다. 예수님 외에는 모두 ‘깜빡이는 전등’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