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숭배의 대표자는 본래 ‘아브람’이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우상을 깨뜨리고, 우상의 제국인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 이것이 믿음이 시작이다. 창세기 1:2에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 빛이 생기면서 어둠과 분리된다. 한줄기 빛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면서 시작된 것이다. 빛은 반드시 어둠과 결별한다. 문명은 아브라함의 이주를 기억조차 못할 것이다. 트럭에서 모래 한알이 떨어진 듯, 흔적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 아브라함은 ‘빛’처럼 분명하다. 어둠은 어둠에 있어서 빛을 못 본다.
이사야 41장은 우상과 야곱을 대비한다. 사람들은 망치를 들고서 땜질을 하는데, 못을 단단히 박으면서 “우상”을 흔들리지 않게 한다. 이것이 우상숭배자들의 행위다. 우상이 무너지면, 자신도 무너지므로 그렇다. 말콤X 영화는 교주를 우상화하는 폐단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우상끼리 전쟁해봤자, 하나님은 비웃는다. 우상숭배자들이 죽은 우상을 단단히 세울 때, 하나님은 야곱족속을 향해 “지렁이 같은 야곱아!! 버러지 같은 야곱아!!”라고 호칭한다. 하나님이 ‘버러지’라고 부르는 것이 낫다. 세상의 추앙을 받으면서 단단히 고정되는 것보다, 하나님이 “버러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더 낫다. 하나님은 야곱족속을 흔들게 하시고, 고정시키며, 그 손으로 붙드신다.
우상중에 가장 은밀한 우상은 ‘교리와 자신’이다. 교리의 우상은 사람을 ‘사명자’로 둔갑시키면서, 우상을 우상으로 못보게 한다. 우상을 우상인줄 모르니,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다. 우상을 절대화하는 이유는 우상이 하나님이라고 믿어서 그렇다. 사람 영웅도 우상의 일종이다. 또한, 자신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교만과 능력은 서로 협력해서 ‘자신’을 신으로 우상시한다. 자신감은 자신이 우상인 것을 모르게 한다. 자신감이 마음의 눈을 가려서, 자신을 못 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다. 버려진 듯, 구석에 처박힌 듯, 이방인처럼 떠도는 듯, 인생이 쓸쓸한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붙드신다. 41:9에 “내가 땅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이 아무리 추앙해도, 하나님이 떠나면, 그는 불행하다. 하나님이 붙들어야한다.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에서 아무도 없었다. 고향과 아버지와 아내와 사촌동생과 가신들까지 모두 결별한 곳, 사랑하는 자식까지 나무에 묶고서 칼을 든 그 때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하나님께 붙들린 인생은 결코 쓸쓸하지 않다.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라는 호칭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오직 하나님을 신뢰해야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고, 그 영혼이 무덤 깊은 곳에 갇혔다.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시고, 인류의 구원주로 삼으셨다. 예수님도 하나님이 구원하셨는데, 하물며 인생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