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곤신에게 패배하고 짓밟힌 여호와의 법궤 이야기가 사무엘상에 나온다. 언젠가 교회에서 “하나님의 법궤가 질질 끌려갔습니다. 왜죠? 이스라엘이 믿고 법궤를 모시고 예배하고 찬송하며 전쟁을 했는데, 없을 때보다 훨씬 더 패했습니다”라고 말씀했다. 없을 때는 4천명 사망, 있을 때는 3만명이 죽었다. 법궤때문에 패했나? 도대체 왜?
나는 조건댓가의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 철저한 유교주의 논리다. 공자 대신에 예수가 그 자리를 대체하고, 인식은 기복신앙을 하는 사람이 많다. 믿기는 하나님을 숭배하는데,그 본질은 다곤신처럼 살아간다. 다곤신은 해양문명의 상징으로 물고기 꼬리에 사람 몸을 하고 팔과 다리가 있다. 인어왕자 개념이다. 바알신은 농업신으로, 각자 현실적 생계를 위해 신을 선택했다. 과연, 인간이 신을 선택할까. 신이 인간을 선택할까. 어떤 종교는 인간을 제2의 창조주로 추겨세우며, 하나님을 대신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속인다. 과연 그럴까?
다곤신은 법궤앞에 거꾸러졌다. 내 인생은 다곤신이다. 젊은날 30년간 거룩한 도덕률과 금욕주의로 구원의 옥돌을 갈고 닦았으나, 잘못된 휴거는 휴지조각에 불과했다. 십자가 복음앞에 사람의 의로움은 무용지물이다. 하나님의 법궤는 이스라엘의 통제를 벗아나 적진 깊숙히 침투했다. 포로로 끌려가서, 전유물로 다곤신에게 바쳐진 법궤는 홀로 그 위력을 발휘했다. 법궤는 누구를 위하여 전투했는가? 첫째, 이스라엘이 패했고, 둘째 블레셋이 패했다. 모두 패했다. 법궤는 홀로 금쥐를 전유물로 가지고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왔다.
“보상 기대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잘한 것으로 하나님께 보상을 바라면 지은 죄까지 계산해서 받을 것보다 내놓을 것이 많을 겁니다. 보상 포기하세요. 낮아짐과 비어짐과 고난의 댓가로 영광의 보상을 기대하지 마세요. 낮아짐 그 자체가 영광입니다. 보상 없습니다. 대신에, 우리가 예측하지 못하는 주님의 은혜가 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법궤를 예배한 보상으로 전쟁의 승리를 기대했으나, 오히려 패했다. 그러나, 그 실패로 법궤는 적군에 침투해, 다곤신의 사지를 절단하고, 블레셋에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했다. 하나님은 끈으로 묶어 조정하는 우상이 아니다. 상자에 담는다고 갇히지도 않는다. 법궤의 상징물로 그 존재를 보이시고, 할 일을 하신다. 이스라앨은 전쟁에 패했으나 결국 승리했다. 하나님이 홀로 싸워 이기셨다. 이런 하나님이시다. 조금 못해도, 기죽지 말자.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