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 가세요?”
“네비가 스스로 안내한 건데, 막힌 길을 피해서 왔을 거예요”
자주 듣는 말이다. 네비는 스스로 안내한다. 길의 인공지능 시대를 우리는 이미 경험한다. 몇백년 후에는 우리가 원하는 드라마도 스스로 창조되는 시대가 열릴 수도 있으리라. 일본이나 미국에서는 스스로 소설을 창조하는 인공지능이 만들어졌다. 인공지능 네비만 있어도 길을 떠나는 운전수에게 평안을 주는데, 성령의 은혜는 어떠하겠는가. 빛은 어둠속에 능히 길을 펼친다.
빛은 곧 눈이다. 사람이 보는 것 같아도, 본질은 빛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더욱 엄격히 말하면 빛이 눈을 자극하는 것이다. 빛이 없으면 눈도 무용지물이다. 구원은 빛과 같다. 구원이 빛으로 인생에게 들어오면, 믿음의 망막에 상이 맺히는 것이다. 믿음과 구원은 같은 언어다. 구원은 믿음을 낳고, 믿음은 구원을 맺는다.
요한복음은 50p 분량인데, 그 중에서 4p정도 나사로와 마리아 이야기를 하고 있다. 베다니 마리아 집안의 일이 1/10을 차지할 정도면, 그 비중이 엄청난 것이다. 설교문을 빼면, 1/5이 나사로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사로의 부활사건 다음에 향유옥합 사건이 등장하고, 곧바로 예루살렘 입성이다.
향유옥합을 예수님께 부었다. 현실적 계산기로 두드리면, 3천만원의 옥합을 왜 그렇게 했느냐고 물음표가 제기된다. 때를 따라 뜻을 이루는 것이 아름답다. 그때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향유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는 것이 그때 하나님의 뜻이다. 그처럼, 예수님도 청춘의 향유옥합을 깨뜨려 십자가에서 인생을 하나님의 발등상에 드렸다. 십자가 사건으로 구원의 문을 열었던 것이다.
인생은 내일 일을 알 수가 없고, 1시간 후의 일도 알 수 없고, 먼 미래의 일을 예측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아신다. 이 땅의 미래는 하나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실까? 누가 그 뜻을 알고,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겠는가. 마음을 비우고, 때를 따라 뜻에 순복하려면, 성령의 네비가 인도하는대로 살아갈 일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고 사는 삶은 현재를 초월해 먼 미래까지 내다본 가장 아름다운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