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는 영광인가? 고난인가? 믿는 성도는 항상 딜레마에 빠진다. 이것 같기도 하고, 저것 같기도 하다. 이단은 고린도전서 2장 8절를 교묘하게 편집해서 “십자가의 무용론”을 주장한다. 십자가는 ‘반쪽 구원’이라는 논리가 고린도전사 2:8에서 파생되었다.
[고전 2: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는 가정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이 박혔다. 그래서 ‘고난의 주’가 되었다고 이단은 설명한다. 십자가에 못이 박히든, 박히지 않든, 예수님은 영광의 주님이시다. 식민지에 태어나신 것, 말구유에 태어나신 것, 헤롯대왕의 유아 대학살로 이집트 피신을 가신 것,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공격을 받은 것, 헤롯당의 감시를 받은 것, 바알세불로 오해를 받은 것, 제자들까지 외면한 것 등등 33년의 삶이 예수님은 ‘십자가’였다.
‘영광의 주’라고 했을 때, 그 영광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이지, 사람의 영광은 결코 아니다. 사람의 영광은 세상권력의 영광이다. ‘영광(榮光)을 명확히 알아야한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쓴 ’영광‘은 영적인 개념이지, 추앙받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추상명사로서 ’영광‘(榮光)을 잘못 이해하면, 이런 문제가 생긴다.
[요한복음 12:43]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예수님이 세상권력을 추구해서 무슨 이익을 얻으시겠는가? 세상권력은 로마서 1장에 자세히 거론되었듯이, 그들의 상실(喪失)한 마음에 불과하다. 통치자들이 하나님적 지혜가 있었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지 않았을 것이다. 십자가에 못을 박지 않은 것이 ‘영광의 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과 상관없이, 예수님은 영광의 주로 오셨고,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신 것이 바로 ‘영광의 주’이다. 하나님적 영광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영광(榮光)은 꽃(榮)과 불(光)을 뜻한다. 하나님이 보실 때, 예수님은 성령의 불과 찬양의 꽃이 있었다. 세상 것을 추구하면, 하나님이 멀어진다. 어쩔 수가 없다. 세상은 동쪽, 하늘은 서쪽이다. 돈을 추구하면, 신앙이 멀어진다. 절대법칙이다. 사람은 적절한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야한다. 예수님은 33년동안 권력과 명예와 재물이 생길수록 하나님을 더 깊게 교제하면서, 기도와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을 추구했다.
고린도전서 2:8에서 ‘영광의 주’를 절대로 오해하면 안된다. 십자가에 못이 박힌 것이 ‘고난의 주’가 아니다. 십자가에 못이 박힌 그 사건으로 인류의 구원이 완벽하게 완성되었다. 단지, 통치자들이 알았더라면, 그러한 십자가 사건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세상권력을 추구한 것이 아니다. ‘영광의 주’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영광의 주’임을 명확히 알아야한다. 사람이 보기에 ‘영광스러운 일’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수치스러운 일’이라면, 어찌 그것을 행하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