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족보가 세상 왕들의 것과 다른 것은 ‘사실성’에 근거한 것이다. 돈을 세는 세리 마태가 써서 특히 그렇다. 예수님의 선택은 탁월했다. 2천년간 예수님의 족보는 도마위에 올라서 검증을 받았다. 무수한 비판이 있었으나, 그 비판이 성령의 은혜로 인류를 이끌었다. 세종대왕의 족보는 잊혀져도, 예수님의 족보는 생명력을 가진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다. 두 인물의 공통점은 쓸쓸한 광야생활이다. 아브라함은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지만, 말년에 얻은 옥동자까지 모리아산에서 번제를 드린 비정한 아버지였다. 그 사건을 깊게 알지 못하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다윗도 말년에 아들의 반란으로 쫓김을 받은 슬픈 왕이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족보에 명확히 서술했다. 예수님의 족보에 ‘다윗의 불륜 사실’이 정확히 적혔다. 다윗은 예수님의 족보를 지탱하는 중심축이며, 두 기둥의 하나이다. 아브라함의 기둥, 다윗의 기둥 위에 세워진 예수님의 족보인데, 다윗의 기둥이 불륜으로 정의된다.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철저히 검증했다.
세상 왕들은 포장하기 위해 각종 미사여구를 동원하고, 과거 역사를 왜곡하고 조작한다면, 예수님의 족보는 벗겨졌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는데,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다. 다윗은 남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야가 죽은 후에 낳은 솔로몬이다.) 족보에 등장하는 4명의 여인은 근친(다말) 창녀(라합) 재혼(룻) 불륜(밧세바)의 사연을 갖고 있다.
마태는 함구된 왕의 출생을 거론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출생 자체가 없다. 반면, 마태는 예수님의 출생을 감추지 않았다. 묵직한 질문은 2천년간 이어졌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믿는 성도에게 일어난다. 마태의 목적이 바로 그것이다. 족보와 함께 성령잉태설을 쓴 것은 “예수님의 아버지는 누구인가?”라는 파문이 독자에게 발생하게 한 것이다. “믿어라”는 것이 아니다. “믿음”을 강조할 것이면, 요셉의 의심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요한복음처럼 생략했을 것이다. 마태는 사실그대로 드러냈다. 마태가 쓰지 않았다면, 비밀문서를 통해 예수님의 출생은 전해졌을 것이다.
예수님의 출생은 요셉조차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말라”고 한다. 얼마나 무서워했으면, “무서워말라”고 계시를 받았을까? 예수님의 아버지는 요셉이 아니다. 마태는 확실한 힌트 1개를 제시한다. 독자들의 마음속에 더 강한 파문이 발생한다.
“예수님의 친 아버지는 누구인가?”
이러한 질문이 일어났다면, 마태의 의도가 적중한 것이다. 이러한 질문이 없다면, 그것은 “성령잉태설”이라는 교리에 의해 교육받아져서, 마음의 호수가 요동하지 않은 것이다. 마태의 목적은 교리 때문에 제거되었다. 어쩌랴!! 불편한 진실은 마태에게 분명히 있었다. 요한복음은 불편한 진실을 건너뜀의 방법으로 넘어간 것을 알아야한다. 나는 마태의 편집 의도를 본다. 특히, 요셉의 관점에서 생각한다.
“잉태된 씨앗은 아버지가 누구인가?”
그 답은 마태복음 28장을 읽을 때까지 가지고 있어야한다. 이러한 의문의 씨앗을 품고 마태복음을 읽으면, 파도가 출렁거리는 감동이 생길 것이다. 성령잉태설의 교리에 갇혀서 마태복음을 읽는 것과 전혀 새로운 감동이다. 예수님이 사춘기를 거치면서, 요셉이 품었던 그 의심을 갖지 않았을까? 예수님도 스스로 질문했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