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예수님이 머리요, 성령의 숨결로 살아가는 공동체다. 예수님은 3년 사역으로 12사도를 기둥으로 하는 교회공동체를 세웠고, 인자의 권력(섬김의 권력)으로 상호 협력하는 신앙공동체가 되도록 모범을 보이셨다. 그리고, AD37년 티베리우스 로마 황제가 죽던 해, 사도 바울이 택정을 받고, 10년후 AD47부터 안디옥 교회를 중심으로 이방인들을 위한 초대교회가 세워졌다. 2년동안 4개의 교회가 세워졌는데, 각각 5개월씩 기간이 걸렸다. 바울은 초대교회 공동체를 세우고, 5개월 동안 양육한 다음에, 성령께 맡기고 그곳을 떠났다. 성도들끼리 무리가 적든, 많든, 신앙공동체를 형성한 것이다. 성령께서 교회를 사랑으로 이끄신다.
이후, 고린도 교회에 음행사건이 터졌다. 아버지가 재혼한 젊은 계모가 있었는데, 르우벤처럼 아버지의 여자와 육체관계를 가진 것이다. “취했다”는 표현은 동거생활을 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성령으로 행하는 자들은 육체의 법에서 자유로우니,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성령의 은혜’로서 자유를 누리는 것으로 해석하며, 그 사건을 자랑했다. 사도 바울은 그 범죄자를 교회에서 쫓으라고 했다. 교회 성도들과 해석이 전혀 다른 것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 공동체를 본 것이고, 성도들은 자신들과 친분이 있는 그 성도와 계모를 본 것이다. 적은 누룩이 전체의 빵을 더럽힌다면, 모든 반죽이 더렵게 된다.
해당 사건은 매우 밀도있게 현실에 적용해야한다. 교회공동체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어디까지 제한해야할까? 성도의 자유가 제한당하면, 성도와 성도의 교통도 제한되며, 성령은 성도의 연합을 원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해진다. 성령은 성도의 마음속에 임하고, 성도와 성도의 사이에도 임한다. 성도의 자유가 제한될 때, 성도와 성도의 관계는 단절된다.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성도의 자유를 어디까지 제한하고, 통제할지, 심각하게 고민해야한다.
음행, 탐욕, 우상숭배, 모욕, 술취함, 도둑질을 하는 자는 ‘함께 먹지 말라’고 바울은 권면한다. 우상숭배의 정의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으로 확장한다면, 자유로울 성도는 없을 것이다. 특히, 요즘은 다문화 시대여서 교회안에서 정치적 발언이 매우 자유롭다. 탐욕(貪慾)에는 과소비도 포함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탐욕’에서 자유로울 성도가 있을까? 초대교회 공동체와 한국교회의 상황이 다를 것인데, ‘교주고슬’(膠柱鼓瑟)처럼, 각주구검(刻舟求劍)처럼 적용해도 될까? 그렇다고, 시대가 자유로워졌으니, 교회도 세상처럼 동성애의 구원을 허락하고, 성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한다면, 교회공동체는 무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