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일기장에 내 이름 쓰시나요?”라는 노래가사가 있다. 하루 가운데 누가 가장 많이 생각났는가? 성령의 사람은 예수님이 가장 많이 생각난다. 물고기가 물속에 있듯이, 예수님으로 살아간다. 성령의 사람은 그렇다. 성령을 받으면, 성령속에 머물면, 성령은 오직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을 깨닫게 하신다. 예수님은 결코 역사가 아니다. 지금도 살아계시며, 영생의 핵심이다. 예수님이 없으면, 영혼의 생명은 불가능하다.
성육신(成肉身)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이다. 누가복음 2장은 성육신의 탄생 이야기가 나온다. 그 사건은 2천년 전이다. 21C에 살고있는 우리는 2천년 전에 이미 이뤄진 그 사건을 복음서의 글로 읽고 있다. 미래에 있는 우리가 과거의 베들레헴으로 내려갈 수 있다. 이것이 관점의 성육신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 현장으로 들어가는 것, 성육신이다. 소설기법으로 ‘감정이입’이라고 한다. 목동이 되어서, 마리아가 되어서, 마리아에게 방을 빌려준 베들레헴 주민이 되어서, 동네 주민이 되어서,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봐야한다.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옥타비아누스’가 로마황제로 있던 때에 태어나셨다.
생각해보라. 남편있는 아내는 남편의 고향이 궁금할 것이고, 아내있는 남편은 아내의 고향이 궁금할 것이다. 결혼하고 나서는 자식 걱정뿐이겠지만, 연애할 때는 서로가 살아온 과거의 삶이 무척 궁금하다. 우리의 남편되시는 예수님의 사연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해외 출장을 가신 듯, 성령의 전화통화로만 예수님이 느껴지므로, 자주 남편의 과거 흔적을 들여다 봐야한다. 주님은 우리의 남편이고, 세상은 타인이다. 타인의 소리를 따라가면, 남편이신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겠는가!!
교회안에서도 성도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고, 친밀감이 두터운 것도 좋지만, 주님은 “주님의 이름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했다. 주님과 상관없이 서로 사랑하는 관계는 세상적 교제이다. 교회가 성령의 공동체가 되려면 주님의 이름으로 소통하는 것이다. 주님보다 특별한 성도가 항상 생각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주님이 항상 생각나야한다. 복음서를 통한 주님의 사건이 생각나고, 말씀이 생각나면서, 교회 성도가 생각나야한다. 공동체의 중심은 오직 주님이다. 주님보다 특정한 성도가 너무 자주 생각난다면, 주님의 이름으로 그 생각을 억제하고, 성령께 그 이유를 반드시 물어야한다. 결혼한 부부들도 서로를 생각하는 시간이 별로 없는데, 어찌 어떤 성도가 계속 생각나는 것이 정상이겠는가.
신앙은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이며, 하나님앞에 자신을 놓는 것이다. 그때, 예수님이 하나님과 나를 중보한다. 예수님을 실존인물로서, 신앙적 관점으로서, 성경적 의미로서 알지 못하면, 하나님과 나의 관계도 매우 막연하다. 예수님을 많이 알면 알수록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가 특별해진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다. 복음서를 읽고 읽고 읽으면 하나님이 마음에 스민다. 하나님은 먼 곳에 있지 않다. 복음서의 현장에 마음이 내려가면, 그곳에 성육신으로 임하신 하나님이 계신다.
누가복음 2장 41~52에는 12세 예수님의 사연이 나온다. 그때 예수님은 유월절 때 예루살렘을 방문했는데, 성전에서 랍비들과 대화를 나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사람들과 대화를 즐겼는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았는지, 명확히 드러나는 사건이다. 자녀가 있는 부모라면, 12살 때 예수님의 모습을 자녀교육에 적용해보는 것은 어떨까?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키울 때, 자녀가 하나님께 사랑스러워가도록 양육해야한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모두 사랑을 받도록 양육하면, 그 아이는 훗날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