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은 탄생과 부활을 절묘하게 연결하고 있다. 탄생 때, 천사들이 나타나서 목동들에게 계시하고, 부활 때, 천사들이 나타나서 여인들에게 계시한다. 목동들에게는 “구유에 놓인 아이”가 표적이 되고, 여인들에게는 “실종된 시체”가 표적이 된다.
[눅2: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눅23:52]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눅24:1~6]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중략)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나사로의 부활 사건과 연결된다. 나사로는 육체가 살아났고, 예수님도 육체가 살아났다. 나사로의 육체는 육체가 그대로 살아났고, 예수님의 육체는 살아나면서 새롭게 변형되셨다. 이것이 다른 것이다.
[요11:44]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요20:6]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그대로 놓여 있더라.
시체를 염할 때는 머리를 붕대로 돌돌돌 감는다. 이것이 ‘머리를 쌌던 수건’이다. 머리 따로, 몸 따로 구분해서 행한다. 몸은 세마포를 입힌 다음에 베로 묶는다. 죽은 나사로는 세마포를 입고 묶인 채로, 머리에 수건을 돌돌돌 감은 채로 걸어서 나왔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마포가 푹 꺼져있고, 머리를 쌌던 수건은 돌돌돌 말아진 채로 놓여 있었다. “쌌던 그대로”는 공모양을 유지한 채로 놓여 있었던 것이다. 즉, 육체가 알몸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예수님은 육체가 부활의 몸으로 완전히 변화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나사로의 부활과 완전히 다르다. 예수님의 시체가 실종된 것이 아니다. 죽은 육체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래서, 육체를 가진 성도는 예수님처럼 다시 살아날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