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사야서 61장 2절의 중간에서
매력적인 청년이 나를 사로잡는다. 묶인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시는 청년 예수의 선언에 나는 포로가 된다. 아!! 말씀으로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렇게 아름답다니, “은혜의 사슬”로 표현한 사도 바울의 고백이 내게도 스민다.
욕심의 높이를 줄이고, 하루에 1장씩 복음서만 7개월동안 읽었던 것이 내게는 가장 값진 은혜가 되었다. 마음은 요동쳐도, 나는 매일 복음서에 묶여서 성령으로 항해를 할 뿐이다. 오늘은 하루종일 비가 내림과 그침을 반복하고, 누가복음 4장은 예수님의 이사야 편집에 대해 ‘숨이 멎는 성명서’를 볼 수 있다. 한국 정치인들의 성명서가 ‘누가복음 4장 나사렛 선포의 성명서’를 닮았으면…..
누가복음 4장은 이사야서 61장 본문으로 설교를 하신 예수님이 나온다. 요즘은 본문이 정해져서 주보에 기록되는데, 예수님때는 회당에 마을 주민들이 모이고, 그 중에서 토라를 아는 랍비가 지목받으면, 두루마리 성경을 읽고서 그 말씀을 해석하면서 설교가 진행됐다. 그날, 이사야서 두루마리가 전달됐다. 이사야서는 66장까지 있으니, 거의 끝까지 예수님은 두루마리를 펼쳤고, 61장에서 멈췄다.
61장은 총 11절인데, 장과 절은 본래 없었다. 61장은 ‘구원의 은혜와 보복의 심판’이 동시에 들어있는 이사야의 예언인데, 예수님은 11절 중에서 1절만 읽고, 2절의 중간에서 멈췄다. 2절은 이사야 예언에서 매우 중요하고, 민감한 부분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진 예언인데, 그곳을 건든 것이다. 예수님은 진실로 이사야서 61장 2절의 중간에 위치했다.
[이사야서 61장 2절]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예수님은 “여호와의 은혜의 해”까지만 읽고, 두루마리 성경을 덮었다. 그래서 마을회관 주민들이 “주목해서” 쳐다본 것이다. 이러한 적막은 계시록에도 나온다. 해달별이 침묵하듯, 순간의 정적이 있는 이유는 무슨 말을 할지, 성도들은 궁금했던 것이다. ‘보복의 날’을 삭제한 그 이유도 무척 궁금하였고….
나는 적대감을 가진 원수들이 많다. 많은 것으로 추측한다. 언론인으로 살다보니, 내가 휘두른 정의의 칼날에 다친 기업체 사장과 공직자는 내 이름을 시뻘겋게 기억할 것이다. 나 역시 내 신념과 다른 누군가를 뉴스로 보면, 적대감이 올라온다. 분노의 칼은 화염검이 되어서 그 사람을 찌른다. 인간 본성이다. ‘악을 징벌하는 보복의 날’은 반드시 와야할 것인데, 주님은 “은혜의 날”에서 멈추고, 그곳에 계셨다. 주님은 말씀이니, 이사야의 예언을 편집해서 새롭게 쓰신 것이다.
“보복의 날”은 멀리 가렴!! 내 사랑하는 자들에게서 사라지고, 이방인들에게도 멀어지렴, 나는 모두를 사랑한단다. 그래도 오겠다면, 내가 담당하리라.
주님은 보복의 날 이후 예언을 모두 지우고,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고 선포했다. 그들은 원수 로마를 향한 보복을 원했는데, 주님은 “은혜”만 약속하고, “보복”은 삭제했다. 그래서 나사렛 주민들은 분노를 일으키면서, 보복을 주님께 던진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결국 십자가에서 내려졌다. 주님은 이사야 61장을 ‘은혜의 해’까지만 읽고 덮으셨다. 주님이 덮은 것을 유대인들이 다시 펼쳐서 보복의 하나님을 원하니, 주님이 그 보복을 담당하셨다.
나사렛은 예수님의 고향인데, 이곳은 정통 유대인들의 밀집 지역으로 민족주의가 매우 강한 곳이다. 반면 갈릴리와 가버나움은 이방민족들이 들어와서 친로마 성향이 강한 곳이다. 나사렛 주민들에게 가버나움은 변절자들이 살던 곳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주님은 “보복의 해”까지 삭제하고, 엘리야 시대에는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 시대에는 나아만 장군에게 구원의 은혜가 주어졌다고 하니, 나사렛 주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날, 은혜는 주님께 주어졌다. 그날 설교, 잘한 것일까? 못한 것일까? 성도들에게 왜 은혜가 주어지지 못했을까?
누가복음 4장에서는 베드로의 장모를 ‘사르밧 과부’로 은근히 묘사한다. 갈릴리 과부였던 것 같다. 사르밧 과부에게 아들이 있었듯이, 갈릴리 과부였던 베드로의 장모에게 아들같은 사위로 ‘베드로’가 있었다. 누가복음 4장 나사렛 사명 선포식 사건을 읽으면서, 나도 주님의 마음으로 ‘보복의 적대감’을 삭제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가 주어지길 아프게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