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그리스도 vs 살인적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보낸자’ ‘사명자’ ‘구원주’ ‘메시야’ ‘오실 자’를 의미한다. 구약 정경의 예언을 이룰 자로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기다렸다. 마치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구원할 ‘영웅’과 ‘백마탄 초인’을 기다리듯, 자신의 ‘이상형’을 기다린 것이다.
하나님이 보낸 그리스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는 대속적 그리스도이다. 나머지는 ‘세속적 그리스도’이며, 사람들이 기다린 그리스도는 ‘세속적 그리스도’이고, 베드로 역시 ‘세속적 그리스도’를 기다렸고, 예수님이 그러한 그리스도인 줄 착각했다. 야고보와 요한도 동일했고, 제자 공동체도 대부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은 대속적 그리스도로 오셨다. 성경이 그것을 예언했기 때문이다.
세속적 그리스도는 세상을 위한 그리스도로서, 세상적 그리스도이다. 세상 왕들을 보라!! 그들은 피에 굶주려서, 피를 흘리면서, 살인을 가볍게 생각한다. 정권만 얻으면 그 무엇을 해도 된다. 이것이 세속적 그리스도이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권력을 뺏기 위해, 칼리굴라는 베개로 양 아버지를 살인했다. 얼마나 끔찍한가. 로마황제의 권력은 대부분 그렇게 승계되었다. 과연, 그러한 권력으로 주님이 오신다면 말이 되는가. 세상 권력과 정반대로 오시는 주님이며, 그것이 대속적 그리스도이다.
세상은 한마디로 ‘살인적 그리스도’이고, 주님은 ‘사랑의 그리스도’이다. 세상은 ‘정치적 그리스도’이고, 주님은 ‘죽는 그리스도’이다. 세상은 ‘영광의 그리스도’이고, 주님은 ‘저주의 그리스도’이다. 저주와 사랑과 죽음은 모두 같은 맥락으로 흐른다. 세상의 왕들은 자신이 살고, 자신이 영광을 누리고, 자신이 권좌에 오르고, 자신이 군림한다.
반면, 주님은 백성을 구원하고, 백성을 살게 하고,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 백성의 죄를 용서하고, 백성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백성을 살게 하려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주님이다. 그래서 주님은 ‘죽는 그리스도’이며, ‘대속적 그리스도’이다. 대속(代贖)은 대신 값을 치른 것이다.
백성의 생명을 위해 생명을 내주신 분이 예수님이고, 세상의 왕들은 자신의 생명을 위해서 백성의 생명을 뺏었다. 그래서 세상의 왕들은 ‘살인적 그리스도’라고 한다. 살인적 그리스도의 다른 이름이 ‘영광의 그리스도’요, ‘정치적 그리스도’요, ‘권력의 그리스도’이다.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영광을 버리고, 순종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백성을 구하기 위해 아들의 목숨까지 희생양으로 삼으셨다. 그처럼, 사람을 사랑하신 하나님이시다. 그 사랑을 진실로 믿는 자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그 마음에 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