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주께서 유일하게 ‘불가능’을 선언하신 곳이 있다. 에덴동산을 만들고 ‘선악지식나무’에 대해서 ‘불가능과 금지’를 경고했다. ‘죽음의 푯말’까지 붙여놨고, ‘관계자외 출입금지’로서 통제했다. 아담에게 “먹으면 정녕코 죽는다”고 했으니, 신신당부한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하고, 그 말씀을 사람이 지키는지 보신다. 사람은 그 말씀을 지킬 능력이 없다. 그래서 말씀이 사람을 지킬 수 있도록, 성령을 의지해야한다.
‘선악과 금지’를 해제한 인물이 있다. 뱀이다. 하나님은 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불가능의 자물쇠’로 여겨진 그 문제가 뱀은 쉽게 풀어낸다. 지혜로운 어떤 방법을 제안하면서, 선악과를 먹을 수 있게 했으니, 하와는 얼마나 탄복했을까? 과연, 내가 기도해도 해결이 안되는 문제가 있는데, 누군가 그것을 해결해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 해결해줬다고 믿어야할까?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고린도전서’ 편지를 보내면서, 교회분쟁을 매우 심각하게 지적했다. “바울이 십자가에 메달렸느냐”고 직격탄을 날렸다. 바울은 회심하고, 초대교회를 세우면서, 기독교 교리를 집대성한 위대한 인물인데, 예수님이 못해낸 일들을 했다. 그런데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을 외쳤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바울의 입장에서 “십자가는 제자 공동체의 무능력으로 발생했다”고 할 수도 있을텐게, 그렇게 안했다. 왜 그랬을까?
예수님은 ‘십자가’로 귀결된다. 하나님은 낮아져 예수님이 되셨고, 그 예수님은 한번 더 낮아져서 죄인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무덤에서 사람들의 모든 죄를 없앤 다음, 부활해서 인생들의 마음속에 들어오셨다. 성육신과 십자가는 ‘예수님의 본성’이다. 누군가 십자가를 없앤다면,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게 유혹한 뱀의 꾐이다.
십자가를 믿는 자마다 마음속에 십자가의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그 마음은 선악나무와 생명나무가 존재하는 에덴동산이 되고, 생명나무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그 영혼에 생명수가 흘러넘친다. 이것이 바로 사마리아 여인에게 약속한 ‘영생의 샘물’이다. 이단들은 100% 십자가를 제거한다.
십자가를 제거하는 것은 예수님을 없애는 것이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척추요, 대속적 그리스도로서 기준점이다. 십자가가 사라지면, 예수님도 사라진다. 십자가가 없다면, 우리는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한다. 십자가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주다. 십자가가 폐해지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구원주가 되지 못한다. 죄사함은 십자가를 통해서 왔기때문이다. (대속적 그리스도)
아담은 타락해서 쫓겨났고, 후아담인 예수님은 죄를 청산하고 부활했다. 완성된 에덴동산에 다시 출현해서 ‘생명나무와 선악과 사건’을 흔드는 자들은 창세기 3장의 뱀이다. 이것을 명심해야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동산에 세워진 새로운 선악나무요, 예수님은 생명나무다. 선악나무는 따먹지 말라고 했듯, 십자가는 세상 것을 단절하는 것이다.
세상 것을 취하면, 그것과 연합한다. 창기와 연합하면, 창기의 지체가 된다. 영생을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하고, 성령으로 사는 자들은 예수님과 연합해야한다. 예수님과 연합하려는 결단이 ‘십자가’다. 권력과 돈과 명예를 추구하면서 예수님을 사랑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무능력이 세상의 능력보다 더 능력있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은 안하는 것이 ‘능력’이다.
** 선악과 사건을 남녀의 사랑으로 해석하는 성경해석은 결국 ‘십자가’를 폐한다. 그러한 성경해석은 독사과다. 비진리와 연합하면, 진리와 결별해야한다. 진리의 성령은 곧 예수의 성령이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주어짐을 믿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