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는 무엇인가? 사형수가 메달려 죽은 저주의 나무다. 반역자의 머리를 메달아 ‘효수’(梟首)했는데, 그것이 십자가다. 기독교는 십자가를 ‘구원의 증표’로 삼고 있다. 과연 십자가는 구원인가? 저주인가?
나는 3가지 성경적 단면을 제시하고자 한다. 나는 21C 인물이고, 예수님은 AD1C 인물이니,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인물의 관점에서 ‘십자가’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때 남겨진 기록물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있다. 그 중에서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 장면1 : 마태복음 16장
헤롯 안티파스가 불륜사건을 공개적으로 폭로한 세례요한을 공개적으로 참수했다. 이후 예수님은 갈릴리 지역으로 선교활동 주무대를 옮겼다. 5천명이 몰린 오병이어 표적, 4천명이 따른 칠병이어 기적이 있었다.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다.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의 그 믿음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고, 십자가를 드러내서 말씀했다. 베드로는 십자가를 반대했다.
베드로 : (예수를 붙들며 항변하며)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님 :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예수님을 자신의 존재를 발견한 베드로에게 비로소 ‘십자가’ 문제를 꺼냈다. 그랬더니, 베드로는 결사 반대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맡긴 ‘대속적 그리스도의 사명’을 베드로와 상의했던 것이다. 대신 값을 치르는 것은 ‘소금과 빛’이며, 교회의 사명이며, 근원적으로 지성소 역할로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다. 속죄(贖罪)는 십자가를 통해 가능해서, 그것을 말했던 것이다. 인간의 죄값이 계산되면, 사탄은 물러나야한다. 사탄은 죄의 어둠을 발판삼아 사람에게 들어왔으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사탄이 방해한 것이다. 우리가 첫 번째 장면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만 십자가를 내세웠고, 제자 공동체는 십자가를 반대하거나, 무관심했다. 십자가의 다른 이름은 ‘거룩한 희생’이다.
# 장면2 : 마태복음 17장
헤르몬 산에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올랐다. 헤르몬산은 만년설이 있을 정도로 여름에도 눈이 내리는 높은 산이다. 그날, 함박눈이 내렸는지, 아닌지, 예수님의 옷은 빨래한 듯 하얗게 변화되었고, 모세와 엘리야도 나타났다. 환상이 열린 것이다. 마가복음에는 ‘별세’를 의논했다고 나온다. ‘십자가’ 사건을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와서 의논한 것이다. 마태복음 17장의 분위기에서 모세와 엘리야는 십자가를 찬성한 것 같다. 모세는 어떤 십자가를 짊어졌고, 엘리야는 어떤 십자가를 짊어졌을까? 모세와 엘리야는 ‘십자가’를 지고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헤르몬산까지 출현할 수 있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했는데, 그들이 나타난 것을 보면, 그들의 생애는 십자가였다. 모세는 궁궐의 안락함을 버리고, 40년의 광야 연단생활을 보냈고, 이집트 백성 60만명을 탈출시켜 40년의 속죄생활을 보냈다. 엘리야는 국가의 번영을 버리고, 도망자 신세가 되어서 그릿 시냇가로, 시돈 지방으로 숨어서 지냈다. 모두 국가권력과 대항했던 선지자다. 십자가를 지고 사는 자는 헤르몬산에 오를 자격을 갖춘다. 출애굽을 하고,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려고 호렙산에 오를 때, 그 영광이 가득했다. 호렙산 정상에는 모세만 올랐는데, 신약의 헤르몬산에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도 올랐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요, 은혜다. 예수님은 모세처럼, 엘리야처럼, 그 시대 권력과 대항해서 십자가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냈다. 로마황제를 대신한 빌라도, 헤롯왕, 종교권력자 가야바앞에서 그렇게 했다.
# 장면3: 마태복음 4장
16장과 17장에서 확인했듯, 십자가는 차선책(次善策)이 아니고, 절대적 사명이었다. 창조주는 십자가를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셨고, 십자가를 통해 죄짐을 감당하고, 부활하심으로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살기 위함이다. 십자가를 보이는 것으로 보면 ‘저주’이지만, 의미로 보면 ‘희생과 사랑’이 담겨있다. 마태복음 4장을 보면, 마귀는 세상 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유혹했다. 1)경제 2)능력 3)권력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속성을 거부했다. 그러나, 예수님도 경제와 능력과 권력을 가지셨다. 단지, 세상처럼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오병이어 기적을 보면, 경제적 능력을 가지셨다.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은 종교적 능력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따랐고, 12사도와 70문도를 직접 거느렸다. 예수님은 권력을 가졌으나, 그것을 휘두르지 않았다. 예수님은 경제를 ‘나눔의 대상’으로 삼았고, 능력은 ‘사랑의 대상’으로 삼았고, 권력은 ‘섬김의 종’으로 삼았다. 마태복음 4장은 세상과 구분짓는 예수님의 본질이 드러난다. 마귀와 예수님의 중간지대에 ‘십자가’가 놓여있다. 십자가는 곧 하나님 나라의 국경선이다. 십자가를 벗어나면, 세상에 속한다. 세상을 점령했다고 믿고 싶겠지만, 세상에 점령당한 영혼이 될 뿐이다. 십자가를 벗어나면 안된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을 나눈 다음,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선과 악’으로 쪼개듯, 구분해서 하나님의 뜻만을 가지고 십자가를 짊어졌다. 그래서 십자가는 신약동산에 새롭게 세워진 선악나무면서, 생명나무다. 에덴동산의 첫 아담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사망나무가 되었고, 마지막 아담은 선악과를 먹지 않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생명나무가 되었다. 첫 아담은 뱀과 아내의 말을 듣고 ‘세상 지혜’를 취했던 것이다. 마지막 아담은 아내와 같은 베드로와 제자 공동체의 말을 듣지 않고, 마귀의 제안도 물리치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취함으로 생명나무가 된 것이다. 십자가는 곧 하나님 동산의 철조망이며, 천국의 국경선이다. 벗어나면, 영적 죽음이다. (경제적 향락, 능력의 자랑, 권력의 군림이 자신에게 주어진다면, 그것은 세상으로 향하는 배경이다. 스스로 멈춰서 영혼의 좌표를 점검해야한다. 그러한 것들을 향하는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고, 돌이켜야한다. 경제와 능력과 권력이 악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을 잘못 사용하는 인간의 탐욕이 죄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