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교리는 교회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오랜 세월동안 수정, 보완되었다. 기독교 교리의 핵심은 성육신-십자가 대속-무덤 부활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나타내는 핵심이다. 즉, 기독교 교리는 예수님 그 자체다. 맨 처음, 오순절 성령강림 때, 신약성경도 없었고, 제자 공동체는 오직 구약성경을 정경으로 믿었다. 구약성경속에서 예수님의 존재를 재발견한 것이다. 그것이 성육신-십자가 대속-무덤 부활이다.
무덤 부활은 요나의 표적을 통해서 예언되었고, 성취되었다. 또한, 이삭의 번제사건을 통해서도 이삭이 산에 올랐다가 그대로 내려왔듯이, 예수님도 3일만에 무덤에서 살아나셨다. 이삭이 죽지 않고 부활해서 육체로 살았듯이 예수님도 육체로 살아난 것이다. 모리아 산을 올라가는 이삭과 내려오는 이삭은 육체는 같았지만, 본질은 달랐다. 그와같이,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 이후에 육체가 살아나서, ‘영체와 결합한 새로운 육체’가 되신 것이다. 육체가 살아났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의 육체가 실제로 살아나지 못했다면, 이삭의 번제사건의 예언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제자 공동체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의 행하심을 재발견한 것이다.
사도들이 죽고, 목격자들이 죽고, 복음서만 남겨지자, 영지주의자들이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그때 교리가 보완된 것이다. 본래 교회의 교리는 ‘신랑이신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대한 것만 있었다. 앞서 말했던 성육신-십자가 대속-무덤부활이다. 성찬식을 한 것도 우리의 죄를 대속하고,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축하기 위해서 했다. 예수님은 진실로 죽음을 이기신 이 땅의 하나님이시다.
반면, 이단들은 기독교 교리를 공격하기 위해서 이론적으로 만들어서, 교회 공동체를 흔들었다. 성경의 사건을 짜깁기로 발췌해서 새로운 이론을 집대성한다고 해서 구원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신학은 결코 진공상태가 아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성도의 모임인 교회를 위해서 성경이 존재하는 것이지, 성경을 위해서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단들의 교리는 교리로 성도를 옭아맨다. 반면, 주님은 ‘성경’을 말씀의 떡으로 신부인 교회에 나눠주셨다. 이것이 근본적 차이점이다.
사도바울의 경우,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 편지를 보내면서, 교회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권면하고, 책망하고, 사랑하고, 보듬고, 훈육하고, 달래면서 신학적 논증을 펼쳤다. 신학적 논증을 자랑하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다. 오직,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지식을 먹을 것으로 나눠준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교리다. 기독교 교리는 성도를 옭아매는 그물이 아니고, 성도들을 위해 희생하는 십자가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창녀와 합하는 자는 창녀의 육체가 되고, 예수님과 연합하는 자는 영이 된다고 설명했다. 세상 것들과 연합하면 육체로 전락하고, 성령으로 예수님과 연합하면 영이 된다.
우리가 특별한 것을 찾다가, 생명되는 일상을 잃을 수도 있다. 하와는 특별한 것을 좋아하다가 선악과를 따먹고, 뱀독에 걸려서 생명나무를 잃게 됐다. 날마다 주님의 말씀을 주식으로 삼고 살아야한다. 다른 복음은 없다. 새로운 것이 있을 것 같지만, 죽음앞에 무슨 유익인가!! 십자가 외에는 대책이 없다. 인생의 죄를 예수님이 십자가로 대속했으니, 다른 구원주는 없다. 어떤 탁월한 종교 혁명가가 출현해서 엄청난 업적을 이룬다고 해도, 십자가의 대속적 사건은 영원하다. 예수님은 인류역사의 원년이며, 기준점이다. 예수님의 구원주로서 사명은 시간이 영원하듯, 영원하다. 기준점이 어찌 변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