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장창훈 기자 / 에세이]=만년필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면, 어김없이 드라마를 봤던 습관을 일기쓰기로 전환하고 있다. 기억을 더듬어, 하루의 갈릴리 호수를 되돌아 건너가면, 아침의 해변이 떠오르고, 광야길을 걷듯 살아낸 시간의 자취가 바람처럼 불어온다. 까페와 복음과 예수님이 항상 기억속에 서 계신다. 오늘은 거의 모든 까페가 문을 닫았다. 스타벅스는 추석에도 문을 활짝 열고 손님을 맞는다. 나처럼 서울에 남겨진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치즈 토스트를 사서, 2층 고요한 창문앞에 앉아 몇권의 책을 출간하고, 사도바울의 생애를 다룬 신앙서적을 읽었다.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으면, 평생 복음으로 교회를 세우며, 네로황제의 광기앞에서 기쁨의 순교를 맞았을까? AD50년 로마황제 클라우디우스가 유대인 추방령을 내릴 때, AD56년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동역자들을 설득해서 로마에 교회 공동체가 세워지도록 이사를 하게 했다고 하니, 오!! 바울의 도전정신은 상상 이상이다.
짐승의 권력이 있듯, 인자의 권력도 있음을….. 칼리쿨라는 자신의 양 아버지를 베개로 죽이고, 자신도 암살당하고, 칼리쿨라의 여동생 아그리피나는 남편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암살하고, 아들인 네로에게 결국 죽임을 당하고, 네로황제도 스스로 자살하고….. 권력이 번창해서 범람하는 황궁의 실상이 ‘짐승의 세계’임을 알면서도, 권력을 동경하는 인간의 흉악함이여!! 권력은 잔인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력은 사랑스럽고, 자상하고, 자애롭고, 온유하다. 혹자는 주님께서 권력을 멀리했다고 하지만, 아니다. 주님은 모든 권력을 가지고서, 짐승처럼 쓰지 않은 것이다. 권력의 칼을 가지고 죽이는데 쓰는 자들이 있고, 사람을 살리는데 쓰는 복음의 사람들이 있다. 주님은 권력으로 생명을 살리는데 쓰셨다. 부자청년은 가진 돈을 쌓아두고 자신과 가족을 위해 썼다. 바나바는 구리광산을 사도들의 발앞에 두고 하늘을 위해 모든 소유를 바쳤다. 2C까지 히브리서 저자는 사도 바나바였다고 한다. 마가의 삼촌으로 알려진 바나바의 사랑과 인품이 바울의 불같은 성격에도 부드러움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어제는 밤늦게 커피를 마셨더니 잠을 설쳤다. 오늘은 저녁 커피를 마시지 않고 ‘초가을 우엉차’ (1+1)를 사왔다. KBS에서 공작 영화를 방영해서 잠시 봤다. ‘공산당’의 지배를 받고, 당이 부여한 명령으로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이 기괴했다. 사람들은 권력을 가지면, 그 권력을 자기 마음대로 휘두른다. 권력에 종속된 노예여서 그렇다. 권력이 그 사람을 조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권력을 다스린다. 권력을 다스려야지, 권력에 지배를 받으면 안된다. 예수님은 권력을 다스렸고, 섬김의 사랑으로 권력을 활용했다. 권력이 군림과 지배의 무서운 얼굴로 나타나면, 짐승의 권력이다. 권력 즉, 권위가 부드러운 사랑의 얼굴로 나타나야한다. 18년 꼬부라진 여인을 고쳐주신 예수님의 그 긍휼처럼!! 살아있다는 것은 살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살아 계신다. 살아계신 예수님은 어디에 계실까? 나는 예수님이 너무 너무 좋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인품과 향기를 확인한다. 내일은 누가복음 14장이다. 자야겠다. 夢 !!
2019. 9. 13. 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