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9월 14일 누가복음 14장을 읽었다. 독자는 누구나 알든 모르든 현실의 시대적 배경의 옷을 입고 있고, 작가는 그 시대적 배경의 옷을 입고 있어서, 복음서를 읽는 순간 과거와 현재가 겹친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가는 동안 ‘광풍’을 만나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고, 광풍이 없다면, 건너지 못한 것이다. 복음서를 읽는 것은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가든지, 예수님이 이곳으로 오던지, 둘 중의 하나가 있어야한다.
“떡 잡수시러” 예수님이 가셨다. 초청을 받으신 것 같다. 중반부에 예수님이 집주인에게 ‘초청자 명단 교체’를 말씀하신 것을 보면, 그렇게 추측된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을 “물을 달라”고 하셨지만, 실상은 생명의 물을 꺼내기 위함이었다. 그와같이, 누가는 “떡 잡수시러”라고 표현하면서, 후반부에 “생명의 잔치”를 거론하고 있다. 결국, 잔치를 베푸시는 분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3부류에게 말씀을 하고 계신다. 1)수종병에 걸린 사람 2)청함을 받은 높은 손님들 3)집주인이다. 병든 자들은 초청자 명단에 없지만, 소문을 듣고 온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이 오히려 ‘초청된 손님들’이라고 비유로 말씀하신다. 청함을 받은 손님들에게는 “말석에 앉으라”는 인자의 권력을 말씀하신다. 그들은 수종병 환자를 고치는 예수님을 보면서 이미 정죄의 판단을 내림으로 ‘심판자’의 자리에 앉았던 것이다.
인생은 판단의 판사가 될 권리가 모두에게 주어진다. 그때마다 ‘심판받은 심판주’ ‘구원받지 못한 구원주’로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억해야한다. 판사는 대부분 악몽에 시달린다고 한다. 정죄하는 표현의 자유는 모두에게 있으나, 스스로 죄인의 자리에 앉아서 십자가를 지는 것이 겸허의 지혜다.
누가복음 14장 13절에는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고 한다. 이들 명단이 14장 21절에 그대로 반복된다.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떡이 생명의 떡이 있듯, ‘가난한 자’도 경제적 가난한 자가 있고, 마음이 가난한 자가 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을 거룩하게 섬기는 ‘거지 나사로’와 같은 사람들이다. 몸이 불편하고 다리를 저는 자들은 사업실패와 결혼실패와 같은 인생의 고난을 경험하고 십자가를 짊어진 인생들이다. 맹인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음을 진실로 깨달은 ‘구석진 어둠’에 속한 자들이다. 세상에서 버려져 빛이 없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빛이 비춘다.
[이사야 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결국, 예수님은 누가복음 14장에서 그 바리새인의 지도자를 전도하려고 식사초대에 응했고, 그 지도자를 둘러싼 가시덤불과 돌짝과 상대해서 영적 전쟁을 하시면서 말씀의 씨앗을 뿌리면서, 반대의 광풍을 맞으셨다. 식사를 하셨는지, 못하셨는지, 나오지는 않지만, 누가복음 11장의 ‘쫓겨남의 찬물’은 맞지 않으셨다. 바리새인 집주인의 마음에 말씀의 씨앗이 스몄던 것 같다. 이날, 위험을 무릎쓰고 말씀을 외친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최소한 3명은 마음의 요동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1)집주인 2)수종병 환자 3)함께 먹는 사람중의 하나(눅14:15)
누가복음 15장은 예수님이 베푸는 큰 잔치 이야기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