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8장은 ▲한맺힌 과부과 뇌물 판사 비유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부자청년과 낙타의 바늘귀 ▲십자가 사건 예언 ▲여리고 맹인 치료 사건이 나온다. 이 중에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는 주의깊게 살펴야한다. 우리의 상식과 다르기 때문이다. 경쟁사회에서 우리는 공부를 열심히 한 학생이 성적이 좋고, 평소 놀기를 좋아하는 학생은 성적이 나쁘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던 바리새인은 ‘낙제’를 받았고, 말씀대로 살지 못했던 세리는 ‘합격’을 받았다. 도대체, 어찌 이런 일이!! 신앙은 이론이 아니고, 실기시험이며, 인터뷰다.
누가의 편집의도는 ‘세리’에게 초점이 맞춰졌고, 그 세리는 결국 ‘삭개오’로 구체화된다. 매우 독특한 예수님의 비유는 바로 뒤편에서 2명의 인물로 등장하며,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한 성도의 마음가짐이 무엇인지 누가는 명확히 말하고 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죄인으로 참회하는 마음가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그저 아버지 구두를 닦아주는 역할 정도다. 세례요한조차 신발끈 풀기도 감당하지 못한다고 했다. 인간이 하나님의 행하심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행함은 1원짜리 동전 수준이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1조원의 프로젝트다. 비교할 수가 없다. 우리는 한달에 100만원으로 생활하면, 국가는 100조원으로 경제를 운영한다. 규모가 다르다. 이처럼 하나님의 의로움은 사람의 의로움과 비교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판결을 해줘야, 비로서 “의인”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아무리 친환경 농법으로 농사를 지었어도, 정부에서 “친환경 농산물”로 인정을 해줘야만, 합격품이 되듯 그렇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마음은 하나님께 나아올 때 자복하는 마음이다.
인간의 의로움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작은 기회이며, 인간의 죄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회일 뿐이다. 인간의 의로움이 하나님의 의로움을 받는 조건이 아니다. 죄인도 하나님의 의로움을 입는 조건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의,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을 만나서 ‘거룩한 성령’을 받을 수 있다.
바리새인이 잘못된 것은 의로움을 행한 것이 아니고, 의로움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내세운 것이다. 하나님의 의로움을 간구하지 못한 것이다. 죄인들에 비해 자신이 상대적으로 의롭다고 느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세가 흩어진 것이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오직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 외에는 없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눅18:14)
이후 부자청년 사건이 나온다. 부자청년의 행함은 바리새인의 기도와 거의 흡사하다. 19장에 나오는 삭개오는 세리의 기도와 흡사하다. 실제로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으로 들어가셨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삭개오는 부자청년에게 말했던 내용을 자신이 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눅 19:9)
결국, 누가의 편집의도는 “예수님이 하나님이다”는 의미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님을 내려와서, 부자청년과 세리장 삭개오에게 각각 응답을 하셨다고 보여주고 있다. 오!! 이 땅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