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장창훈 기자]=춤추듯 출렁이는 성경을 따라 8개월을 살았다. “광야를 걸으라”는 설교 말씀을 의지하며, “집”을 버리고, “광야”를 택했다. 성경의 복음서를 깊게 걷듯 읽기 전에는 성경이 “건축의 설계도”로 알았다. 그러나, 건물 공사는 반드시 “돌발변수”가 발생한다. 공사업자가 “공사대금”을 올리거나, “소방설비 기준미달”의 문제가 있거나, 설계업자의 “설계변경”에 따른 설계비 요구가 생긴다. 성경이 그러했다. 창세기 3장에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하나님의 말씀을 하와가 따먹고, 아담도 따먹었다. 둘은 금슬(琴瑟)이 좋았다. 이게 성경이다. 베드로가 우상숭배의 핵심지인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주는 그리스도요”라고 고백했다. 오!! 놀랍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더욱 놀랍다. “죽는 그리스도다. 모두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이게 성경이다. 바리새파를 중심으로 예수님의 추종세력을 색출해서 처형하려고 밀실음모를 꾸몄다. 세족식을 통해 스승의 사랑을 듬뿍 받은 제자들은 충성맹세를 했다. “저는 죽어도 주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라고. 그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닭이 2번 울기전에 너는 나를 3번 부인할 것이다”라고. 그 예언이 놀랍게 이뤄졌다. 오!! 성경은 예측할 수 없는 드라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죽었다. 그리고, 시체 실종 사건이 발생했다. 부활!! 아무도 몰랐다. 이게 성경이다. 내 인생도 나도 모를 ‘부활의 날’이 언젠가 오리라!!
누군가 말했다.
“갈등은 살아있는 증거다. 죽은 자는 갈등도 없고, 아픔도 없다”라고.
“아멘!!”
성경은 ‘독특한 이분법’이다. “선과 악”을 규정하고, “선인과 악인”을 규정하지 않는다. 선악과 사건만 해도 그렇다. 하나님의 최초 사랑을 받은 아담, 아담을 위해 특별히 준비된 하와, 그들이 낳은 첫아들 가인, 그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했다. 존속살인사건이다.
끝에서 끝난다. 그래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베드로의 인생이 과연 “선인이다” “악인이다” 판단할 수 있을까? 없다. 닭이 2번 울던 그 때, 베드로는 3번 부인했다. 주님의 말씀을 이뤘는가? 주님을 부인했는가? 그 모호한 경계선에서 인생은 허탈감에 빠지고, 그저 ‘낙향하는 베드로’처럼 겸허해질 뿐이다. 나는 성경이 좋다. 갈등이 넘치는 장면에서 나는 드라마를 보듯, 마음이 긴장한다.
주님을 멋지게 증거하며, 세례를 베푼 세례요한이 “오실 그 이가 당신입니까, 다른 이를 기다릴까요?”라고 물었으니, 어디서 이런 인물을 만나겠는가? 나는 세례요한의 질문의 옷을 입고 오늘도 살아간다. 모든 인생이 그러하다. 복음서가 쓰이던 AD55~65년 그 사이에도 순교자가 급증하면서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인생의 고난은 모두에게 무거운 십자가로 지탱하게 하므로, 세례요한의 질문은 모두의 대변자다.
어제 방영한 SBS 수목 드라마 ‘시크릿 부티크’(김선아, 장미희 주연) 는 ‘갑을’의 갈등관계를 생동감있게 표현했다. 드라마 작가를 존경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사라와 하갈의 갈등관계는 통속적으로 ‘주인과 종’의 관점도 있지만, ‘갑과 을’의 관계로도 설정된다. 시크릿 부티크가 그러한 갈등관계를 현대적으로 연출했다. 적극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