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9장에서 예수님은 성(城)을 보고 슬피 우셨다. 그 멸망을 알고, 장례의 애도를 표한 것이다. 달리다쿰(소녀여 일어나라)의 마음으로 주님은 성전정결운동을 하시면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았다. ‘장사하는 자들’은 ‘세속적 종교인들’과 관련된다. 훗날, 시카리당과 열심당이 성전을 차지하고, 내분에 휩싸이면서 이스라엘은 멸망했다. AD65~70년 사이다.
누가복음 20장에서 예수님은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쳤다. 성전의 기능은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고, 백성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다. 주님은 성령의 임재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성전이 되도록 허락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은 곧 성전기능이다. 자식이 부모에게 전화를 하듯, 성도는 성령의 은혜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눅20:2)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예수님께 집단적으로 물었다. 누가는 이 질문을 기록하면서, 반어법을 쓰고 있다. 예수님의 비유로 그것이 드러난다. 예수님은 바로 뒤에서, “포도원을 운영하는 농부들” 비유를 하면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의 권위는 “소작농”임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권위를 부여했고, 소출을 바칠 의무가 있음을 비유로 설명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이것은 십일조의 문제가 아니다. “농부가 바칠 소출”이 곧 “하나님의 것”인데, 그것을 바쳐야한다.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지 않으면, 가이사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한다. 편의점에 가서 신문을 사면 1천원을 내야만 편의점을 이용할 수 있다. 1천원의 기회비용(소출)을 주지 않고, 신문(권위)을 가져올 수는 없다. 농부들은 ‘소출의 얼마’를 주는 댓가로 포도원 경작의 권위를 받았으나, 그것을 하지 않았다.
“왜 하지 않았을까?”
정확한 질문은 “왜 하지 않은 것으로 심판받았을까?”이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집단적으로 힘을 합쳐서 갑자기 나타난 나사렛 청년의 성전 무단 점거를 향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항의하고, 저항하면서, 하나님의 포도원인 성전 지킴이로 나섰고, 매 절기마다 양들을 잡아서 하나님께 소출을 바치고, 백성을 위한 거룩한 제사를 드렸으니….
“소출의 얼마”를 놓고, 해석이 틀린 것이다. 그렇다면, “소출의 얼마”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포도원 농부들이 바쳐야할 ‘소출의 얼마’는 무엇이길래 포도원 경영권을 잃게 됐을까? 예수님 당시에 대제사장 직분은 ‘권문세족’처럼 가문으로 승계됐다. 엄청난 기득권이며, 금수저인데, 훗날 다른 가문으로 넘어갔다. 예수님의 말씀이 실현된 것이다.
‘소출의 얼마’를 받으려고 보낸 하나님의 종들과 하나님의 아들은 선지자들과 예수님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소출의 얼마’를 드려야할까? “아들들은 세를 면한다”는 말씀은 여기에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무익한 종”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포도원을 경작하는 소작농처럼, 살아야한다. 일몰 1시간 전에 부름을 받은 실업자처럼 포도원 주인을 위해 충성해야한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아이유 주연)를 즐겨봤다. 아들 삼형제와 어떤 계약직 알바의 이야기다. 첫째와 셋째가 건물 청소용역 일을 했다. 첫째가 말하길, “우씨, 누가 이렇게 더럽게 한 거야!! 냄새 장난 아냐!! 건물을 깨끗하게 써야할 것 아냐”
첫째 형의 짜증을 듣고 셋째가 말했다.
“형!! 건물이 깨끗하면, 우리에게 청소 안 맡겨!! 더러우니까 우리가 필요한거야. 감사하면서 일해!!”
다음부터, 첫째는 건물계단에 있는 담배꽁초를 주우면서 ‘싱글벙글’이다. ‘담배꽁초들의 더러움’이 그들에게 ‘청소용역의 권위’를 준 것이다.
이제, 고민할 때다.
“소출의 얼마는 무엇인가”
“비유가 풀렸다면, 소출의 얼마를 누구에게 드릴까?”
마태복음 25장에는 열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 비유가 나오는데, 양과 염소 비유가 ‘소출의 얼마’를 푸는 비밀의 열쇠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