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9월 21일, 누가복음 21장과 창세기 21장을 읽었다. 누가복음 21장은 말세예언이 나오고, 창세기 21장은 사라의 이삭출산과 하갈가족의 추방이 나온다. 사라는 ‘이삭’(웃음)이라는 이름을 받고, 때가 되어 얻은 아들에게 ‘이삭’의 이름을 준 후, 8일후에 할례를 받았다. 아브라함 가정에서 최초로 태어나면서 8일만에 할례를 받은 자식이다.
예수님은 이삭처럼, 이름을 받고, 태어나서, 8일후에 할례를 받았다. 예수님은 “임마누엘”이다. 이삭을 낳을 때,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내가 네게 돌아오리라”고 한 그 말씀이 “임마누엘”과 연결된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영원히 돌아오신 증표가 바로 “임마누엘”(하나님이 함께 하신다)이다.
이삭을 낳기 전에 그랄왕 사건이 나온다. 그랄왕은 사라를 취함으로 가족이 멸절할 뻔 했다. 그런데, 요셉은 그랄왕과 비슷하게 “아내를 데려오라”는 계시를 받는다. 그랄왕에게는 “남편이 있는 여인”이라고 했고, 요셉에게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라고 했다. 두 사건 모두 ‘생명의 보호’이다. 그랄왕은 사라를 돌려보냄으로 그랄왕 가문의 태가 열렸고, 요셉은 마리아를 데려옴으로 인류의 구원이 열렸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 ‘구원’이다.
사라가 이삭을 낳자, 마음이 바뀐다. 화장실 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듯, ‘소원성취가 됐을 때’ 마음이 바뀌는 것이 인간의 몹쓸 본성이다. 헤롯정권도 마찬가지였다. 헤롯성전이 완공되고, 그 광채가 수려해지면서, 주변국의 광광명소가 되면서 점점점 교만해지고, AD64년 성전이 완공되자, 로마를 향해 독립을 선포하고, 내분에 휩싸였다. 성전완공이 곧 성전멸망의 증표가 되었다. 인생도, 정권도 참 묘하다.
이삭이 없었을 때는 이스마엘을 축복하고, 이스마엘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고, 이스마엘 때문에 하갈도 돌아보고, 이스마엘 때문에 ‘그랄왕의 가문의 태’까지 축복하면서, 그렇게 살았던 불임 부부의 은혜였는데, 이삭이 생기니, 당장에 ‘이삭’ 때문에 이스마엘을 내쫓고, 하갈을 추방했다.
과연 하갈과 이스마엘이 선악과를 따먹듯 중범죄를 저질렀을까? 그렇게 했다면, 추방당한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갈과 이스마엘의 추방사건은 아브라함 가정에 불어오는 불행의 암시다. 누군가에게 화살을 날리면, 그 화살을 자신이 받아야한다. 그래서, 결국 이삭도 죽을 운명에 처하고, 사라는 결국 향년 127세에 죽었다.
그와같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메달았던 헤롯성전과 대제사장 가문은 티토스 장군에 의해 멸망당했다. 로마병정의 창 끝에 찔려 피흘림을 당하신 예수님은 결국 로마황제를 임명하는 교황의 주권자로 영광을 받으셨다. 그처럼, 피흘림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되고, 피흘림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니, 인생을 어찌 살아야할까?
있는 자는 없는 자처럼, 없는 자는 있는 자처럼 그렇게 낮은 마음으로 살아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