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은 마태복음과 색채가 완전히 딴 판이다. 마태는 “다윗”과 “요셉”을 내세우고, “마리아를 용서하는 남편”을 내세웠다면, 누가는 마리아의 믿음, 사가랴의 아내를 내세웠다. 마태는 헤롯왕의 유아 학살사건을 보도했지만, 누가는 그것도 없다. 오히려, 옥타비아누스(1대 황제)의 인구 조사령을 내세운다.
누가복음 1:13에 천사가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고 했다. 사가랴는 무엇을 간구했을까? 무엇을 간구했길래,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준다”고 했을까? 사가랴는 아내의 임신을 간구했을까? 얼핏 보기엔,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사가랴는 아이 출산의 축복에 대해 반신반의한다. 간구했던 기도였다면 “아멘”했을 것인데,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다”고 변명한다. 마치,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아브라함과 사라가 과연 이삭을 간구했을까?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간절히 원하지 않았으나, 하나님은 이삭을 줬다. 간절히 원했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나타나 축복했을 때, “아멘”했을 것인데, 그들은 “아멘”보다는 “노멘”으로 응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삭을 주셨다. 사가랴에게 요한의 잉태를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무엇을 간구했을까?
나는 그것을 놓고, 깊게 고찰했다. 어쩌면, 사가랴는 민족종교의 타락을 놓고 기도했던 것은 아닐까? 로마의 탄압, 권력의 부패, 향락의 침략을 놓고, 이사야처럼 사가랴는 이스라엘의 영적 부흥을 위해 기도했던 것이 아닐까?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민족이 살아나길 간절히 기도하다보니,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어서, 자식의 축복이 내려온 것이 아닐까?
아브라함도 그렇다. 하갈과 동침하고, 이스마엘을 낳고서 입양한 후에, 사라도 그 이스마엘을 자기 자식처럼 진실로 사랑하였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새로운 자식을 낳겠다고 생각했으면 이스마엘을 친자식처럼 키울 수가 없다. 이스마엘을 친자식 이상으로 사랑한 그들이다. 라헬이 자식이 없었을 때, 몸종 빌하를 통해 ‘단’을 낳은 것처럼, 이스마엘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친자식과 동일했다.
남의 자식도 자기 자식처럼 귀하게 여기며 입양한 사라에게 ‘친자식’의 축복이 왔음을 우리는 알아야한다. 그들은 결코 ‘이삭’을 원하지 않았다. 17장에서도, 18장에서도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스마엘이 잘 살길” 간구했지, “새로운 생명”은 불가능으로 단정했다. 그때, 하나님은 “이삭”을 주셨다. 과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삭을 구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은 이삭을 주셨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브라함과 사라는 무엇을 구했길래, “이삭”의 축복을 얻었을까?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또 이르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창21:5~6)
18장과 19장을 통해, 아브라함은 심판받을 소돔을 위해 눈물로 간구하면서, “롯”의 생명을 구했다. 또한, 사라를 뺏은 원수 아비멜렉 집안의 생명과 자손을 위해서 간구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기도하고 있는가? 아브라함은 ‘소돔성의 심판’을 면제해달라고 간구했다. 그것이 혹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아닐까? 사라를 뺏어간 그랄왕을 위해 기도한 아브라함은 이듬해 이삭을 낳았다. 이러한 사건의 배열은 우연일까?
“이것을 해주시면, 주의 나라를 위해서 쓰겠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한다. 그때마다 주님은 어떻게 응답하실까? 내게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은 항상 이러했다.
“창훈, 너나 잘해라!! 너가 내 것 되길 원한다. 그것 말고 없다. 너가 내 것 되면, 그때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