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甲)과 을(乙)은 본래 싹(甲)과 새(乙)를 의미한다. 그런데, 갑(甲)이 쇠망치로 바뀌었고, 을(乙)은 망치에 얻어맞은 “닭”이다. 갑은 강하고, 을은 약하다. 을의 울음은 누가 닦아줄까?
창세기와 모세 5경이 끝나면, 여호수아와 사사기가 펼쳐지고, 왕들의 역사인 ‘사무엘서’가 나온다. 그 사이에 ‘룻’이 들어있다. 다윗왕조를 위해서 첨부된 ‘룻기’인 것이 분명하지만,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10년의 흉년을 통해 우리에게 시사하는 교훈은 적지 않다. 다문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룻기를 어떻게 이해해야하나?
나오미는 남편을 의지하고, 두 아들을 데리고, 흉년을 피해 모압 지방으로 이민갔다. 이방민족에서 ‘이방인’으로 살았던 나오미 가족들이다. 다행히 모압 여인을 며느리로 얻었고,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비슷하면서 엉뚱하게 ‘두 아들’을 잃었다. 롯은 두 사위를 잃고, 두 딸만 살아남았다. 두 며느리와 시어머니만 남아서, 세 여인은 간신히 살아냈다. 그리고, 베들레헴에 풍년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나오미는 고향으로 가야겠는데, 두 며느리가 고목나무 매미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나는 왜 룻기 2장만 읽으면, 눈물이 자주 흐르는지요?”
베들레헴 고향이 오니, 이제 룻이 이방여인이다. 이방여인으로 ‘베트남 며느리’처럼 베들레헴에 온 것이다. 남편도 없는데, 시어머니를 의지하고 살아보겠다고 온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시어머니를 통해 ‘신앙’을 배운 것이다. 나오미의 하나님이 룻의 하나님이 되었으니, 룻은 하나님 때문에 시어머니를 떠날 수가 없었다. 그러한 룻을 하나님은 버리지 않았다. 나오미는 룻을 “딸아”로 부른다. 딸처럼 며느리를 사랑하였다. 베트남 며느리가 아니더라도, 친정을 떠나 남편의 시댁으로 오는 모든 며느리는 ‘이방여인’처럼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딸”처럼 사랑하지 않으면, 어찌 정을 붙이랴!!
보아스는 자신의 집에서 이삭을 줍는 룻을 선대했다. 마치, 룻이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시어머니를 선대하듯, 그러했다. 그런데, 그런 보아스에게 결국 룻이 아내가 되었으니, 인생의 일은 그 미래를 알 수가 없다. 정직과 양심으로 살아가면, 이삭을 줍듯 겨우 살아갈 것 같아도, 하나님의 은혜가 갑자기 찾아온다.
남편을 잃은 나오미, 또 남편을 잃은 룻. 두 여인은 과부였으나, 민족이 서로 달랐으나, 서로를 의지하며 살았으니, 남편이 없으나 있는 듯, 그러한 고부(姑婦)의 화목에 하나님의 은혜가 두 날개로 찾아왔다. 다문화 가정에도 이러한 화목이 있기를 바래본다. 나오미가 모압에서 이방여인으로 있다가, 고향에 오니, 룻이 이방여인이 되듯, 갑과 을은 자주, 자꾸, 시소처럼 바뀐다. 갑은 을처럼, 을은 갑처럼 그렇게 서로 섬기면서 사는 것이 인생의 미덕이 아닐까? 은혜를 베푼 보아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갑자기 찾아올 줄 누가 알았으랴.
이삭줍는 연약한 손길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