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4장은 ‘엘리에셀 이야기’다. 창세기 속에 숨겨진 어떤 늙은 종의 신앙이 1장이나 서술된다. 엘리에셀이 없었다면, 이삭의 아내도 없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나안에 왔듯이, 리브가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나안에 올 수 있을까? 온다고 해도, 이삭의 아내가 될 수가 없다. 연고(緣故) 때문이다. 연고가 없으면, 문은 열리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내를 위해, 연고(緣故)가 있는 밧단아람(하란)으로 늙은 종을 보냈다. 엘리에셀이다. 그는 아브라함과 약속을 지켰다. 그 근본은 ‘하나님의 신실함’이다. 사람과 약속은 그 사람이 없는 곳에서 ‘변질’된다. 반면, 하나님과 약속은 반드시 이행된다.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에게 ‘신앙심’을 넣어줬던 것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위대한 정신이다.
좋은 목회자를 만나는 것은 엘리에셀과 같은 목회자를 만나는 것이다. 엘리에셀은 리브가를 만나서, 아브라함과 이삭을 소개했고, 라반과 브두엘을 설득해서 리브가를 아내로 택했다. 리브가도 기꺼이 엘리에셀을 따라 나서기로 작정한다. 엘리에셀은 거짓없이 행했으며, 자신의 것으로 취한 것이 하나도 없다. 아브라함이 없었고, 이삭도 없었다. 그런데, 엘리에셀은 주인의 이익을 위해, 아삭의 결혼을 위해, 자신이 맡은 역할을 다했다. 신약시대에 엘리에셀은 세례요한으로 대치된다. 세례요한이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예수님을 세상앞에 소개했고, 자신의 두 제자 사도요한과 안드레를 ‘리브가처럼’ 시집보내듯, 제자로 보냈다. 요한복음은 그것을 증언하고 있다. 참 신랑은 오직 예수님 외에는 없다. 엘리에셀은 신랑이 아니고, 중매자다.
창세기 24:2에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라고 했다. 늙은 종은 아브라함의 모든 소유를 맡아서 관리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상속자를 바꾸는 반역을 꾸밀 수도 있다. 누가복음 20장의 포도원 살인사건(상속자 살해)은 이러한 성경적 근거에서 출발한다. 결국, 사업의 번창보다 중요한 것은 신앙의 견고함이다. 엘리에셀이 리브가를 만나서, “아브라함의 번창에는 나의 땀방울이 있었다”면서 자신의 공적을 자랑해서, 엘리에셀의 아들 며느리를 구했다면 어찌할까? 그런데, 인생은 자주 그렇게 한다. 슬픈 비극이다.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창24:63)
이삭은 저녁에 들판에서 기도하는 삶을 살았다. 모리아산 번제사건이 그에게 큰 깨달음을 줬으리라. 그는 무엇을 위해 묵상기도를 했을까? 기도하다가 왜 눈을 들어서 봤을까? 기도했든 그 기도의 응답은 받았을까? 그런 이삭을 본 리브가는 ‘너울’을 가지고 자기 얼굴을 가렸다. 기도하는 이삭조차 리브가의 눈에는 “들에서 배회하다가 우리에게로 마주 오는 자”로 보였다.
광야에서 배회하듯, 하늘을 바라보며, 저녁을 사랑하는 그러한 삶이 아름다운 인생이다. 풍요로운 자본주의에, 견고한 민주주의 권력에 속지 말자. 인생은 결국 선분이다. 선분(線分)이 직선(直線)이 되는 길은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외에 없다. 리브가가 이삭을 만나듯, 예수님을 만나야 영생을 얻는다. 세상 것은 일회성이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과 음료는 영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