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은 재혼했다. 남편은 보아스다. 나오미의 장남인 말론과 결혼했으나, 사별했다.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까지 왔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다. 신앙으로 새로운 가족을 얻는 것은 ‘무모한 모험’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인생을 책임진다. 기생 라합이 그러했다. 여리고성 문을 열어준 라합은 마태복음 족보장에 기록된다. 보아스의 어머니가 라합이며, 아내가 룻이다. 보아스, 그는 누구인가?
2명의 정탐꾼을 숨겨준 기생 라합은 이후 살몬과 결혼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여리고성 전투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정탐꾼이 죽었다면, 이스라엘은 정보수집에서 낭패를 당하게 된다. 기생 라합이 문을 열어준 것은 마리아가 하나님께 몸을 내어드린 것과 같다. 보아스는 라합을 어머니로 뒀고, 룻을 아내로 얻었다. 놀랍다!!
사람들은 여리고성을 차지하고, 기생 라합을 잊었을 것이다. 단지 역사의 첫부분에 기록할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잊지 않는다. 보아스를 기억한 것은 ‘라합’을 기억해서 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찌 그녀의 행함을 잊을까. 은밀하게 행한 ‘정직’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 룻기를 읽으면서, 나는 기생 라합의 의로움을 보았다.
“위기는 기회다”는 말이 있다. 기회가 오면, 매미채로 잡듯, 순간에 잡으라는 말도 있다. 룻기는 “NO”라고 한다. 기회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다. 나오미는 계획적으로 룻을 보아스의 논으로 보내지 않았다. 그냥 갔는데, 그곳이 보아스의 밭이었다. 보아스는 계획적으로 룻을 잘 대해준 것이 아니다. 나오미를 기억해서 룻을 선대한 것이다. 마치,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도들을 잘 대하듯, 그렇게 한 것이다.
룻은 시어머니의 말씀대로 보아스의 발치에 들어갔다. 그러나, 보아스는 젊은 여인의 유혹을 취하지 않는다. “기회”는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다. 보아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기업을 무는 첫 번째 친족을 만나서, 장로 10명을 증인으로 내세워서, 그 사람에게 기회를 줬다. 남의 기회를 무작정 취한 것이 아니다. 룻이 품속에 들어왔어도, 보아스는 그냥 돌려 보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기 위해서였다. 남의 기회를 함부로 짓밟아서는 안된다.
룻기 4:1에 “보아스가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고 했다. 기회를 가진 자의 이름은 ‘아무개’였다. 아무개이지만, 그에게 기회가 있음을 분명히 고지한다. 그는 “기업을 무르겠다”고 했다. “룻”의 존재를 말하니, 그 아무개는 “기업을 포기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보아스는 아무개에게 기회를 줬고, 자신에게 기회가 왔을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한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취할 정직의 삶이다. 경쟁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보아스의 정직’은 시사점이 크다.
보아스는 아무개의 기회를 함부로 뺏지 않았다. 그 아무개가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기회를 줬다. 이것이 양심이며, 정직이다. 보아스의 정직이 훗날 다윗의 삶으로 상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