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SBS ‘그것이 알고싶다’를 보고 깜짝 놀랬다. ‘감옥에서 보내온 성령’을 다룬 내용인데, 내가 있던 옛날 단체 이야기가 아닌데, 내가 경험했던 ‘진리의 족쇄’와 너무 흡사했다. 이단은 어떤 종류라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정통속에도 이단의 속성이 많아서, 그 누가 알랴!! 루터가 ‘마귀’로 정죄받은 것은 베드로의 정통성을 수여받은 교황 레오 10세였다.
1520년 1월 3일, 교황은 루터를 파문했고, 95개조 루터의 반박문에 대해 “주여 일어나소서”를 발표했다. 교황은 루터를 “포도원을 망치는 멧돼지와 뱀”으로 비유됐다. 창세기 3장의 옛뱀이다. 그런데, 레오 10세는 이듬해 1521년 10월 1일 모기에 물려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45세, 청춘의 때에, 그는 죽었다. 인생의 일은 그 누가 알랴!! (남을 악하게 하면, 교황이라도 면죄부가 없는 것 같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누가 멧돼지였을까?)
‘감옥에서 보내온 성령’를 통해 나타난 이단의 속성은 성경에 대한 왜곡이다. 놀랍게도, ‘왜곡’이 그들에겐 ‘진리’다. 그래서 무섭다. 성경의 말씀을 사람이 인식할 때는 ‘해석’을 통해 받아드린다. 해석되지 않은 성경말씀은 없다. 번역과정이 해석이듯, 모든 말씀은 해석의 과정을 거친다.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것은 ‘진리’와 직접 상관있다.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를 ‘옛뱀’으로 지목했고, 루터는 ‘교황’을 바벨론으로 비유했다. 왜 둘은 서로 상반될까? 누구의 해석이 옳은가? 면죄부(免罪符)를 놓고 둘은 의견이 대립했다. 교황은 “성전건축을 위해 면죄부 허용”을 말했고, 루터는 “죄사함은 십자가외에 없다”고 주장했다. 모두 해석의 문제다.
‘감옥에서 보내온 성령’ 사건이 사회적 문제가 된 것은 ‘타작마당’ 때문이다. 타작마당은 그들의 세계에서는 ‘은혜’요, 세상이 보기에는 ‘폭행’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행위가 ‘십자가의 논증’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그들은 성경의 말씀대로 행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논리는 성경에 근거한다. 모든 종교는 ‘말씀’에 근거해서 행동한다. ‘해석’이 다를 뿐이다. 마치, 이삭이야, 이스마엘이야, 장자권을 따지는 기준이 다르듯 그렇다.
그들은 가족끼리 서로 뺌을 때렸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렸다. 해병대 시절 선임이 신참 둘을 세워놓고, 서로 뺨을 때리는 고문을 행했는데, 그들이 실제로 그렇게 했고, 가족끼리 그렇게 하도록 했다. 끔찍한 가족해체였다. 성경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자라야, 내 형제요, 내 자매라는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다. 과연 그렇다면, 왜 “뺨을 때리라”는 명령이 주어지는가? 성경말씀을 “뺨을 맞으라”이지, “뺨을 때리라”는 아니다. “때리라는 명령”은 누구로부터인가?
[눅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마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누가복음은 “가족을 미워하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가족보다 주님을 사랑하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가족을 미워하는 것과 ‘가족을 덜 사랑하는 것’은 다르다. 이혼하는 이유는 ‘다른 여자’를 더 사랑해서 생긴다. 사랑은 마태복음의 말씀(10:36)처럼 우선순위에 ‘방점’을 둔다. 하나님은 당신을 최우선에 두고 사랑하라고 하신다. 그렇다고, 자식을 증오해서 원수처럼 죽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과연, 아브라함이 이삭을 원수시해서 번제로 삼았을까? 하나님을 더 사랑해서, 덜 사랑하는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열정으로 이삭을 사랑하였다. 미움은 ‘2번째 사랑’이다. 1등과 2등은 모두 ‘1등급’에 속하듯,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 사랑으로 가족을 사랑할 것이다. 주 안에서 가족을 사랑할지라. 가족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찌 하나님을 사랑하랴. 아브라함은 이삭을 사랑하듯, 더욱 하나님을 사랑했던 것이다.
거짓 복음에 속지말자. 타작마당을 한다면서, 가족을 해체하는 그런 성경해석은 비진리다. 잘못된 성경해석은 ‘증오’를 낳는다. 사람의 원수가 집안 식구라고 하면,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주님의 말씀을 중심해서 살려고 하면, 선과 악이 반드시 나눠진다. 그때, 보다 선한 쪽에 있는 사람은 보다 악한 쪽에 있는 사람을 사랑으로 품어주고, 기도해주고, 뺨을 맞아주는 쪽이다. 뺨을 때리는 쪽이 ‘선’이 아니다. 주님은 복음서에서 단 한번도 “뺨을 때리라, 또 때리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뺨을 때리는 것은 ‘악’(惡)이다. 악을 용납하고, 이해하면서 뺨을 맞으라는 말씀만 있을 뿐이다. 교회안에서 어찌 “뺨을 때리고, 또 때리라”는 말씀이 허용될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