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던 의자를 버렸다. 주민센터에서 ‘생활폐기물 신고필증’을 신고하고, 딱지를 붙여서 버렸다. 사연이 깊고, 정이 들었으나, 내 집에 어울리지 않아서 오늘 버렸다. 버림에는 아픔이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30년간 정들었던 성경해석을 내가 버렸던 것도 갈라디아서에서 주장한 바울의 외침과 흡사하다. 율법으로 사는 것은 은혜가 오기 전까지다. 은혜가 오면, 율법의 어둠은 사라진다. 초등학교때는 대분수로 사칙연산을 하지만, 중학교때부터 대분수는 없어지고, 가분수로 계산하듯 그렇다. 군대를 전역하면, 군복과 총과 군화를 반납하고 나온다. 율법은 임시적 군복과 같다.
“이렇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해서, 그것을 믿고 행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의의가 무엇인가?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그것을 묻고 있다. 율법의 행위와 십자가의 은혜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과연, 공부를 잘해서 졸업장이 주어지는가? 성적과 상관없이 졸업장이 주어지는 그 은혜는 ‘십자가의 믿음’과 흡사하다.
보통 개근상(皆勤賞)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근면으로 우리는 천국에 입학하려고, 이 세상을 졸업하는 은혜를 얻었다. 율법의 행위는 ‘부적’과 같아서, 루터는 ‘면죄부’를 판매한 교황의 거짓을 들통냈다. 과연, 루터는 은밀히 감춰진 죄를 파헤친 ‘멧돼지’와 같았다.
마태복음 5장 6장 7장에는 예수님의 성경해석이 드러난다. 기존의 율법을 더욱 완벽하게 해석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수록됐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위해, 구약정경을 어떻게 해석할지 방향을 제시한다. 그 중에서 창세기 3장이 압권이다. 선악과 사건을 놓고, 예수님은 어떻게 해석했을까? 마태복음 4장이 창세기 3장의 해석이다. 뱀은 곧 마귀다. 먹는 것, 사는 것, 누리는 것 등등 정치와 경제와 권력의 각종 것들을 제시하고, 마귀가 유혹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겼다. 선악과는 단순히 먹는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요셉에게는 은밀한 밀실의 접대(接對)로 선악과 문제가 나타났고, 예수님께는 십자가를 거부하는 지혜로운 정당과 날카로운 검(劍)으로 다가왔다. 예수님은 거부하고, 말씀을 따라 갔다. 그랬더니, 죽음에서 부활이 일어났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
아벨과 가인의 문제도 그렇다. 창세기 4장에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다. 제사가 끝나고, 왜 하나님은 가인에게 나타났을까? 아벨은 어떤 제사를 지냈을까?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다. 단지,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기록이 다음에 나온다. 아벨의 제사는 무엇일까? 가인은 자신의 의로움으로 제사를 지냈고, 아벨은 가족의 죄를 놓고 참회로 제사를 지냈던 것은 아닐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유대인들의 제사와 예수님의 제사가 근본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보여준다. 십자가 사건이 있던 그 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어린양의 제사가 있었고, 골고다 십자가에서도 ‘어린양’의 제사가 있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를 아벨처럼 받으셨다. 마치, 아벨의 피흘림을 듣고, 가인을 찾아가신 하나님처럼 그러했다.
공관복음에는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관계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관계가 자세히 나타난다. 사도 요한이 세례요한의 직속 제자였기 때문이다. 요단강의 세례사건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고 했던 것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세례요한의 후계자를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왜 그랬을까? 감옥에 갇혔을 때도 예수님은 그들의 제안을 사실상 거부했다. 왜 그랬을까?
마태복은 예수님을 “제2의 모세”로 설정했다. 그렇다면, 유대광야에서 40일은 모세의 40년 미디안 광야생활이다. 그러면, 세례사건은 무엇을 암시할까? 모세는 이집트 왕국의 안락함을 버리고, 광야생활을 택했다. 그처럼 예수님은 세례요한 종파에서 2인자 위치를 거부했다. 마치, 이스마엘이 장자권에서 밀려나 광야로 가듯, 야곱이 축복권을 얻었으나 광야로 가듯, 요셉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채색옷을 입었으나 벗겨져서 노예로 팔리듯, 그러했다. 하나님의 영적 상속권은 항상 광야로 흘러갔다. 나는 광야에서 살고 있는가?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