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고찰(考察)을 할 때, 유의사항이 있다. 성경은 ‘기록문서’라는 것이다. “나는 자유다”라는 말은 좋거나, 나쁘거나, 무섭거나, 아름답다. 쇼생크탈출에서 “나는 자유다”는 위대한 지질학의 승리다. 반면, 취객이 칼로 시민을 찔러 죽였다면, 그 자유는 살인이다. “나는 자유다”는 문장은 문맥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성경도 그러하다.
소금과 양파와 김치와 돼지고기를 썰어서 김치찌개를 만드는 것이 ‘성경해석’이 아니다. 성경해석은 사골곰탕을 끓이듯이, 성경구절과 사건을 본문과 맥락을 깊게 고찰하는 것이다.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요기서 조금씩 발췌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면, 그것은 ‘인본적 성경해석’이다. 성경은 성경속에서 해석해야한다.
갈라디아서는 그 깊이와 떨림을 알려면, 바울의 독자입장이 되어야한다. 바울의 독자가 되려면, 사춘기 시절 ‘첫사랑의 편지’를 떠올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또는, 개척교회를 경험해본 사람들은 개척자를 떠올려야한다.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2년동안 갈라디아에 4개 교회를 개척했다. 교회 성도 숫자는 나오지 않지만, 초대교회는 4곳이다. 바울은 그들을 사도회의에서 자랑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한 사도들의 편지를 받아냈다. 안디옥 교회에 돌아온 바울에게 들려온 소식이 있었으니, 갈라디아 교회가 바리새파 지도자들의 공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는 그런 상황에서 쓰였다.
3장에서 아브라함 이야기가 나온다.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을 위해서, 유대인들의 공격자를 막아내기 위해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편지를 썼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많은 사건중에서 시작부분을 다룬 것이다. 아브라함의 출생이 ‘이방인’으로서, 믿음이 없었다는 사실이 바울에게는 매우 중요했다. 첫째, 독자들이 이방인이었고, 둘째 반대자들이 유대인들이었다. 독자들에겐 축복이요, 반대자들에겐 증거였다.
바울은 대충 믿지 않았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구원을 받을까? 아니다.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받을까? 아니다. 구원은 어디서 출발해서 누구에게 오는 것일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음의 씨앗을 뿌렸고, 이삭으로 결실했다. 그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며, 예수님으로 결실한다. “믿음”은 “예수님은 그리스도다”를 믿는 지적 동의를 넘어선다.
“믿음이 오기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갈3:23)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믿음’과 바울이 사용하는 ‘믿음’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도대체 무슨 ‘믿음’이기에, ‘믿음이 온다’고 했을까? ‘계시될 믿음’은 또한 무엇인가? 믿음이 오기전까지는 율법에 갇혀있다. 이런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성경적 믿음’은 시작에서 끝까지 믿음으로 행하신 하나님의 진실함이다. 믿음만능주의로서 “믿으면 돼지”라고 주장하는 자들에게는 ‘믿음’이 결코 그렇지 않음을 바울이 경고한다. 십자가 믿음은 십자가를 분양하는 것과 같다. 십자가는 믿으면서, 십자가를 거부하면, 그것은 십자가를 지식으로만 아는 것과 같아서, 십자가의 능력이 무익하다. 믿음은 결국 하나님의 행함이며, 행위보다 더 강한 ‘능력’이다. 믿음의 다른 말은 ‘하나님의 행위’다.
구원은 율법의 행위로 되지 않고, 약속을 믿음으로 된다. 곧,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인데, ‘하나님의 행위’를 믿는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조건을 세우고, 착한 행실을 한다고 해도, 율법적 선행은 구원을 이루지 못한다. 구원은 영생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허락이 없다면, 하나님의 행위가 없다면, 구원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과 그 행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은 이 땅에 성육신으로 태어나,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행동하셨다. 하나님의 그 행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구원은 율법의 행위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행위로 됨을 반드시 믿음으로 시인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