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울교육방송 보도국장이다’는 명제는 올바르다. 사실에 근거했다. 사실의 문장속에 단어는 ▲나 ▲서울 ▲교육 ▲방송 ▲보도 ▲국장 ▲는 ▲이다로 구성된다. ‘마침표’가 맨 끝에 찍혔다. 8개 단어속에 ‘서울’을 빼자. 그까짓 것!! 빼자.
‘나는 교육방송 보도국장이다’
내가 ‘서울’을 빼고, 위의 문장을 말하면, ‘사기죄’에 해당된다. 나는 교육방송 보도국장, EBS 보도국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해석은 이와 같다. 문장의 전체 뜻을 현저하게 달라지게 하는 ‘단어’를 삭제하면, 성경해석은 정반대가 된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할 때, 그렇게 했다. 말씀에 ‘사족’을 붙여서, 말씀을 변질시켰다. 하나님은 성경해석은 허락했고, 성경왜곡은 금지했다.
공산주의 이론은 예수님의 인자권력보다 더 아름다운 이상세계를 가져올 것 같다. 공산주의는 대표적인 ‘뱀의 지혜’다. 서로 나누는 이상세계는 하나님의 약속이 맞지만, ‘공산당’의 특권층을 중심으로 이상세계를 이루는 것은 ‘짐승의 권력’이다.
민수기 21장에 불뱀 사건이 나온다. 살모사처럼 무서운 방울뱀일까? 독(毒)이 바짝 오른 뱀이다. 원망과 불평을 하면, 그것이 영혼을 해치는 불뱀이 된다. 그래서 불은 화(火)다. 화(火)를 내면, 자기 영혼을 불로 태운다. 불뱀이 물자, 모세는 불뱀을 장대에 메달았다.
뱀을 잡을 때는 반드시 긴 막대기로 잡아야한다. 해병대 시절 살모사를 몇 번 잡았다. 막대기를 길게 해서, 목을 “콱” 눌러야한다. 꼬리를 잡으면 물린다. 막대기로 머리를 “콱” 누르면, 이빨이 튀어 나온다. 그때 “돌”로 찍어야한다.
영혼의 불뱀은 어떻게 잡을까? 십자가의 장대로 잡는다. 십자가에 메달린 예수님은 바로 ‘옛뱀을 잡는 법’을 말씀하신다. 모세가 놋뱀을 들었다. 그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뱀을 들었다. 그 뱀이 ‘죄’다. 그래서 ‘죄’를 고백하는 자마다 용서를 받는다.
[요한복음 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니리,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 말씀이다. 모세는 장대에 놋뱀을 들었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메달렸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뱀인가? 성경을 해석할 때, 단어와 단어를 1:1로 대응하듯 단순하게 해석하면, 심각한 모순에 봉착한다. 단어는 문장속에서 살아있다. 손가락은 몸에 붙었을 때 손가락이지, 절단되면 죽은 것과 같다. 단어는 문장속에 속한다. 단어는 문장의 공동체에 살고 있다. 이것을 명심해야한다.
창세기 2장과 3장은 ‘선악과 사건’이다. 창세기 작가는 왜 그 사건을 기록했을까? 우리는 이것을 반드시 질문해야한다. 물론, 성경학자들의 업적으로 방대한 연구실적이 책으로 출간되었겠지만, 성도는 창세기 사건을 읽으면서 스스로 질문해야한다. 책은 독자가 이해하도록 작성됐다. 독자가 이해하지 못하도록 작성되었다면, 그것은 책이 아니고, 비밀문서다.
어떤 종교단체는 ▲따먹다 ▲벌거벗음 ▲임신 ▲중앙 ▲생명나무의 이미지를 본문에서 빼내서, ‘선악과 사건’을 ‘육체관계’로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이 가장 대표적인 ‘뱀의 해석’이다. 뱀이 그렇게 했다. 뱀이 지혜롭게 말하니, 하와도 아담도 선악과를 취했다. 그처럼, 선악과를 이성관계로 해석하는 자마다 ‘십자가’를 폐지한다. 그들의 목적은 ‘십자가 제거’에 있다.
단어-문장-문맥-책은 연속성을 갖는다. 조례-법률-헌법이 서로 연속성을 갖듯 그러하다. 말초신경-중추신경-뇌가 연속성을 갖듯 그러하다. 창세기 2장과 3장은 ‘1장’과 연결된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말씀”이 핵심이다. 그래서, 창세기 2장과 3장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은 “아담과 하와”가 핵심주제다. 더도, 덜도 없다. 이성타락으로 쫓겨난 것이 아니다. 뱀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이성타락’이 원죄라면, 사라의 지혜를 듣고 하갈을 취한 아브라함은 ‘창세기 3장 심판’을 받아야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장자 이스마엘을 축복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이성타락’이 원죄라면, 야곱 사건은 무엇인가? 야곱은 부인이 4명이다. 하나님은 야곱의 자식들을 ‘이스라엘의 족장들’로 축복했다. ‘빌하’를 범한 르우벤도 족장의 축복을 받았다.
과연, 요셉이 보디발 아내의 달콤한 유혹을 이겨서 축복을 받았는가. 달콤한 그 유혹이 선악과일까? 아니다. 선악과는 ‘선악지식의 나무’에 열린 실과다. 성경원문에는 분명히 ‘선악지식의 나무’이다. 창세기는 출애굽기와 함께 작성되었다. 그 시대적 배경에서 ‘뱀’은 무엇인가? 바로, ‘지혜’다. 이집트에서는 뱀을 ‘지혜의 동물’로 숭배한다.
여자는 선악과, 남자는 생명나무라고 하면, 왜 여자가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먹었는가? 영적인 간음으로 그들은 해석한다. 과연 그럴까? 그 뱀이 암컷이라고? 창세기 작가의 집필의도가 과연 그럴까? 독자는 창조적 상상력으로 성경을 탐구할 수는 있지만, 작가의 편집의도를 넘어서면 안된다. 편집의도는 반드시 ‘맥락’과 ‘책’속에 존재한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창조된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선악과 사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고, 뱀의 지혜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변질됐다. 이 사건이 바로 출애굽기 10대 재앙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뱀의 지혜로 대적한 이집트 술사들이 어떻게 했던가? 창세기를 전체적으로 조명하면, 선악과의 의미가 명확하게 좁혀진다.
예수님은 선악과 사건을 “이성범죄”로 해석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뱀의 지혜’로 해석했다. 뱀의 지혜는 먹는 문제, 종교 문제, 권력 문제로 다가온다. 그것이 마태복음 4장 ‘3가지 시험’ 사건이다. 성경을 왜곡해서, 영혼을 사냥하는 신종 불뱀을 조심하자. 청춘 뺏기고, 영혼 뺏기고, 가족까지 뺏긴다. 예수님은 우리 영혼을 지키시는 ‘참 목자’다. 우리는 뱀을 스스로 못 이긴다. 십자가로서 예수님이 뱀을 잡아 죽이신다. 우리는 그것을 믿으면 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