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축복 새치기 사건은 왜 썼을까?
‘속임수’의 지혜로 축복을 감당하라는 의미일까?
‘야곱의 불의’를 후손이 회개하라는 뜻일까?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은 도덕책이 아님을 명심해야한다. 성경은 명심보감과 다르다. 하나님의 관점을 보여주는 영혼의 거울같은 책이다. 명심보감(明心寶鑑)이 마음을 밝게 비추는 보물같은 거울이라면, 성경은 영혼을 비추는 책이다. 신령한 눈으로 성경을 봐야한다.
브엘세바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삭은 블레셋 지역에 거주했으나, 부자가 되니 쫓겨났다. 그랄 지역으로 이주해서,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다시 팠다. 지역주민에게 뺏겼다. 옆으로 이동해서 또 팠다. 다시 뺏겼다. 또 팠다. 3번째 팠더니, 지역주민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셨다. 싸움을 걸어올 때, 계속 물어나면서, 희생을 당하니,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 축복을 주셨다.
이삭의 순종적 삶의 모습이 그대로 표출된 ‘우물 사건’이다. “남 좋은 일만 시켰다”고 속상한 일이 있는가?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중국놈이 벌 듯 손해본 일이 있는가? 이삭의 우물 사건을 통해 교훈을 얻자. 땅에서 손실이 하나님의 축복이 되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구원받지 못한 구원주가 되신 주님은 ‘부활의 육체’로 살아나셨다.
야곱의 축복 새치기 사건은 창세기 27장이다. 26장 34~35절은 27장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창세기 작가는 27장 사건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표지판’으로 26장 34~35을 제시한다. 이것을 무시하고, 27장을 읽으면, 야곱을 오해할 수 있다. 26장 35절에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고 했다. 여기서 그들은 에서의 아내들이다. 이방여인들을 며느리로 얻었으나,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놀랍게도, 이삭은 ‘그런 에서’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주려고 한다. 이것은 은혜인가? 사랑인가? 무개념인가? 창세기 27장은 분별의 문제다. 27장 1절에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와 23절의 “그의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분별하지 못하여 축복하였더라”는 복선이다. 분별력을 상실한 이삭을 암묵적으로 나타낸다. 맹목적 사랑에는 분별력이 없다. 이삭은 무조건적으로 에서를 사랑했다. 그것이 문제다. 아담이 아내를 너무 사랑해서, 아내를 통해 들어온 뱀의 말을 분별하지 못했다.
이삭이 분별력을 갖지 못했으나, 아내 리브가는 분별력이 있었다. 모리아산 번제사건을 경험하지도 못한 리브가에게 어찌 분별력이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신앙은 연륜과 다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 신앙의 기준이다. 리브가는 그렇게 했다. 그래서 염소 2마리를 잡은 것이다. 에서는 장남을 편애했고, 리브가는 두 아들 모두를 사랑했다. 나중에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하니, 리브가는 야곱을 외가집으로 보냈다. 두 아들 모두를 사랑해서, 살리기 위한 성령의 지혜다.
에서의 옷을 입고, 염소의 털을 붙이고, 야곱이 이삭의 축복을 받았다. 누가 축복을 받은 것인가? 대리출석(代理出席)으로 본다면, 에서의 축복이다. 당사자 축복이면, 야곱의 축복이다. 이삭은 야곱을 축복했는가? 에서의 이름을 축복했는가? 이삭은 몇 번씩 “에서냐?”를 확인했다. 야곱은 “에서다”라고 대답했다. 이삭은 “에서”에게 축복했고, 에서의 이름에 축복했다. 단지, 야곱이 그것을 받은 것이다. 축복은 에서의 옷과 야곱의 몸이 함께 받았다. 이것이 쌍둥이 축복이다. 둘은 연결된다.
우리는 가끔, 자주, 축복기도를 놓고 혼동한다. 이삭이 야곱을 축복해서, 축복이 야곱으로 흘러갔다고…. 그것은 이삭의 생각이다. 이삭은 “네 아우가 와서 속여 네 복을 빼앗다”라고 생각했다. 분별력이 없는 이삭의 반응일 뿐이다. 축복은 각각 행위대로 하나님께서 주신다. 축복기도를 받아서 야곱이 잘된 것이 아니다.
에서는 부모 말을 본래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아내를 둘이나 얻었고, 야곱은 어머니의 말에 순종하면서 외가집에서 부인을 얻었다. 야곱의 축복 새치기 사건을 기점으로 이삭의 가정은 파탄됐다. 형제 살인사건이 일어날 위기에 처했고, 야곱은 광야길에 내쫓기고, 형 에서는 하나뿐인 동생을 잃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다. 축복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증표다. 야곱은 ‘속임수’의 단점을 가졌고, 속임수의 전문가 라반에게 가서, 20년 연단의 세월을 보낸다. 야곱을 사람으로 양육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축복이다.
야곱이 사람이 되는 동안, 에서도 쓸쓸한 광야길을 걸었을 것이다. 20년후 두 형제가 재회할 때, 에서의 신앙이 완전히 달라졌다. 야곱의 축복 새치기 사건으로 하나님께서 에서를 새롭게 연단시켰고, 에서도 새사람이 된 것이다. 우리는 ‘축복’을 ‘아파트 당첨’으로 오해하면 안된다. 축복을 받으면, 고난이 온다. 고난을 통해 사람이 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축복이다.
** 야곱의 축복 새치기 사건은 십자가 사건의 상징이다. 리브가는 “저주를 내게 돌리라”고 했고, 야곱은 에서의 옷을 입고서 축복을 받았다. 그처럼, 예수님이 심판의 저주를 받았고, 우리는 예수님을 옷입고서 하나님께 축복을 받았다. 이것이 ‘이신칭의’(以信稱義)다. 우리는 ‘야곱’의 이름으로는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 수 없다. 맏아들 에서의 이름으로 축복을 받을 수 있다. 구원과 영생은 맏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에서는 팥죽으로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았지만, 예수님은 팥죽도 받지 않고, 우리에게 장자의 명분을 허락하신다. 우리의 이름을 숨기고,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성령께서 리브가처럼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
** 야곱과 에서는 신약성경에서 ‘장자와 탕자’로 새롭게 각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