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4장은 아브라함의 종결판이다. 바울은 매우 위험한 성경해석을 통해, 율법에 현혹당한 초대교회 성도들을 응급처방한다. 초신자들이 유대교 출신 지도자들에게 잘못된 성경해석을 듣고서, 할례를 받고서 율법을 지키려고 하니, 바울은 거룩한 분노를 표출했다. 그것을 ‘해산하는 수고’로 표현한다.
바울이 말하는 ‘비유의 이미지’는 ‘종과 아들’이다. 앞서, 아브라함을 ‘이방인으로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음을 바울은 설명했다. 이제,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것을 통해 초신자들의 신앙을 바로잡고 있다. 우리는 ‘바울의 비유’를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종과 아들’의 논증을 펼치기 위해서, 두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두 여자’를 말한다. 그 이유는 이스마엘과 이삭은 아브라함의 씨(氏)다. 자식과 아버지의 관점에서는 모두 동일했다. 단지, 아내의 출신이 서로 다르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4:24에서 “이것은 비유니”라고 한 것은 ‘두 여자를 통해서 두 아들을 해석하는 것’이 비유적 관점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하갈과 사라에 대한 성경해석은 ‘바울의 해석’이지, 성경적 진실은 아니다.
어찌, 하갈과 사라가 비유인가? 만약, 하갈과 사라가 비유가 되면, 지금 시대에 누군가 나타나서,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사건은 비유이니”라고 말하면서, 새로운 논증을 펼칠 수 있다. “이것은 비유니”라고 말한 것은 그 사건을 “비유”로 단정한 것이 아니고, 그 사건을 “비유”로서 해석하는 것이다. 바울이 ‘하갈과 사라’를 비유로 확정하면, 바울도 ‘비유’로 확정될 위험에 처한다. 실제 사건과 인물은 비유가 아니다. 단지, 비유의 소재로 활용될 뿐이다.
‘행위의 의로움’은 육체에 속했고, ‘약속의 은혜’는 하늘에 속했다. 바울은 그것을 계속 설명하고 있다. 초대교회 초신자들이 율법과 전통과 할례의 근본을 너무 몰라서, ‘사라과 하갈’의 실제인물을 ‘비유의 소재’로 인용해서, ‘비유설교’를 한 것이다. 결국, 바울의 비유는 ‘사라와 하갈의 출신’에 대한 것이다.
길게 설명한 이유는 이단의 교리가 여기서 파생했기 때문이다. 바울의 날카로운 성경해석은 초대교회 초신자들의 생명을 구원했으나, ‘사라와 하갈’에 대한 비유해석이 ‘종-아들-신부의 구원섭리’로 변질되었다. 종-아들-신부의 논증법은 성경적이지 않다. 그냥, 인본적인 성경해석일 뿐이다. 최소한 바울은 ‘사라와 하갈’의 성경적 인물을 통해서 초신자들을 살리기 위해, 성경해석을 했을 뿐이다.
종-아들-신부의 성경해석은 거짓복음이다. 신부의 자격을 논함에 있어서, ‘사람의 행위’가 전제된다. 사랑의 조건이 사람에게 필요하다고 설명하는데, 그 조건이 실상 ‘하갈의 종된 관습’일 뿐이다. 사랑에도 두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하갈’이요, 다른 하나는 ‘사라’다. 종-아들-신부의 비유해석은 ‘신부’가 곧 ‘종’에 해당한다. 율법적 사랑의 행실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비유는 틀이 깨지면, 의미가 깨진다. 비유의 절대법칙이다. 바울의 비유는 ‘사라와 하갈’의 두 여자에 대해서만 했다. 그렇다면, 절대로 그것을 넘어서면 안된다. 그것을 넘어서면, 새로운 비유가 된다. 보라!! 아브라함에게 아내가 셋인가? 맞다. 셋이다. 하갈과 사라와 그두라이다. 세 번째 아내가 과연 ‘신부급’인가? 세 번째 아내도 역시 ‘종급’이었다. 결국, 바울의 비유속에 ‘하갈’은 그두라도 포함된 해석인 것이다.
바울이 ‘사라와 하갈’을 비유의 소재로 채택한 것은 ‘땅과 하늘’, ‘행위와 은혜’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종-아들-신부의 거짓된 성경해석에 속지말자. 누구든지 성령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 예수를 사랑하면, 주님의 신부이며, 교회는 남편이신 예수님의 아내다.
[고린도후서 11:2~4]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