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서가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과 결혼한 사건
성경은 아주 옛날에 씌였고, 히브리어로 작성된 성경이 헬라어(70인역)로 번역되었고, 신약성경도 아람어로 말씀하신 예수님의 설교가 헬라어로 번역되어, 한국어 성경으로 번역되었다. 번역과정에서 상당한 ‘오류’는 ‘오차범위’로 존재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반드시 인지해야한다. 읽는 독자 스스로 ‘인식의 오류’가 발생할 것을 허락해야한다. 마치, 인간은 “죄인됨”을 십자가 앞에 인정하고 나가는 것과 같다. 성경해석은 이미 ‘오류’를 전제한다.
독자가, 신학자가, 목사가 성경을 해석해도, ‘오차범위’의 오류는 존재한다. 완벽은 없다. 누구라도 “이것은 완벽하다. 절대적이다. 믿어라”고 하면, “뱀의 말”이다. 믿지 말라!! 오류가 없는 번역은 없다. 오죽했으면, 번역은 반역(反譯)이라는 말이 있겠는가!! 겸손하자. 낮아지자. 실수와 오류를 미리 인정하고, ‘틀릴 수 있음’을 전제하자. 편견의 선그라스를 벗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자!!
창세기 27장과 28장은 야곱과 에서에 대한 이야기다. 야곱은 형 에서에게 미움을 받고, 결국 외가집으로 피신한다. 그 정보를 에서가 들었다. 에서는 이스마엘의 장녀인 마할랏과 결혼한다. 후처를 얻은 것이다. 우리는 이 사건을 읽으면서, “이스마엘의 행위”를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성경 저자는 분명히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지라”는 표현이 들어있다. 이삭의 사랑을 독차지한 에서가 이제야 ‘철’이 들었다. 아버지의 마음을 살핀 것이다. 동생 야곱은 어머니의 친정으로 가서 근족결혼을 했고, 형 에서는 아버지의 직계인 이스마엘에게 가서 근족결혼을 한 것이다. 하나님의 행하심이다.
성질을 못 이기고, 동생까지 죽이려고 하고, 장자명분을 팥죽과 바꾸던 에서가 20년 후에 야곱을 만날 때, 400명의 경호대를 이끌고서 왔다. 야곱은 가축으로 성공했고, 에서는 군사력으로 성공했다. 만약, 에서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변화하지 못했다면, 4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야곱의 것을 모두 뺏었을 것이다. 에서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야곱은 가축중에서 형의 것을 예물로 드렸고, 에서는 야곱의 것을 뺏지 않았다.
이삭의 아내는 아브라함의 아버지 직계에서 얻었다. 그와같이, 이삭은 장자 에서의 아내를 아버지의 직계인 이스마엘에서 얻어준 것이다. 아버지의 마음을 살펴서, 새롭게 결혼을 한 에서의 변화는 겨자씨처럼 작았으나, 20년이 지나고 완전히 새롭게 달라졌다. 성경을 읽을 때, ‘이스마엘’과 ‘이슬람’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으면, 에서가 이스마엘의 딸을 취한 사건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게 된다. 창세기 작가는 편견없이, 에서가 아버지의 마음을 살펴서, 이스마엘의 장녀와 결혼했음을 말하고 있다.
이삭조차 “야곱이 네 복을 뺏어갔다”고 말했지만, 에서의 복은 에서에게, 야곱의 복은 야곱에게 주어진다. 야곱은 어머니의 오빠 집에서 직장과 결혼문제를 해결하고, 에서는 아버지의 형인 이스마엘의 집에서 직장과 결혼문제를 해결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서 모두 성공해서 만난 것이다. 리브가의 두 마리 염소 축복사건은 하나님의 은혜로 성취되었다. 야곱은 축복을 취해서 형의 미움을 받아 도망침으로, 에서는 축복을 뺏겨서 상실감에 빠져 정신 차림으로, 모두 신앙이 새롭게 덧입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