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注目)을 학교 선생님이 외치면, 우리는 책상밑에서 ‘주먹’을 꽉 쥐면서 선생님을 쳐다봤다. 우리는 주목(注目)했다. 한자를 몰라도, 선생님의 몸짓 언어로 그 뜻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쉬는 시간의 잡담을 멈추라는 것이다.
대학 MT에 가면, “지역방송을 끄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20명이 함께 모인 공개모임에서 둘씩 둘씩 대화를 하면, 시장통이 된다. 3명이 모인 곳에서 2명만 이야기하면, 그곳에서도 왕따가 있다. 5명이 모인 곳에서 2명씩, 3명씩 각각 대화하면, 그곳에도 삼팔선이 생긴다. 언어의 속성이다.
“여자들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으니 조용히 하십시오. ” (고린도전서 14:34_현대인의 성경)
바울의 편지가 압권이다. 여자들은 이 편지를 받고, 교회에 오고 싶지 않을 것이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개역개정)
개역개정도 맥락은 비슷하다. 공동번역은 강압적이다.
“여자들은 교회 집회에서 말할 권리가 없으니 말을 하지 마십시오.” (공동번역)
새번역도 마찬가지다.
“여자들은 교회에서는 잠자코 있어야 합니다. 여자에게는 말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맥락없이 문장만 빼내서 “이것이 성경의 선언이다”라고 할 경우, 엉뚱한 뜻이 된다. 성경말씀은 진공상태에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씨앗이 땅에 뿌려지듯, 특별한 상황이 존재한다. 그 상황을 배제하면 안된다. 공동번역에도 나와있듯이, “교회 집회”에서 여자들은 말할 권리가 없다. 여기서 여자들은 여자 성도들이다. 예배때 성도들은 본래 말할 권리가 없다. 떠들면 어찌 예배를 볼 수 있는가. 예배도 그렇고, 학교도 그렇다. 공연장과 재판장에는 핸드폰을 반드시 꺼야한다. 핸드폰이 울리면 바로 쫓겨난다.
14장 33절에 보면,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가 들어있다. 모든 성도가 교회 예배에 하는 것처럼, 특히 여자 성도들은 예배때 정숙함을 유지하길 바란다고 바울은 권면한다. 예배문화 정착을 위해, 바울은 작심하고 편지한 것이다. 그 당시 예배는 집에서 드렸기 때문에, 매주 새롭게 만난 성도들이 얼마나 반갑겠는가. 떠들다보면, 시간이 훌쩍 흐른다. 잡담하다, 말씀은 들리지 않는다. 잡담이 새떼가 되어, 말씀을 먹을 수 있음을 알아야한다.
예배를 통해 말씀을 듣는 것은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한 말의 속뜻은 “예배때 잡담하지 말고, 말씀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잡념을 잠재우고, 깊은 묵상으로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한다. 주님의 말씀, 성령의 음성은 모기보다 작기 때문이다. ‘수다떨기’를 좋아하는 모든 성도를 향한 바울의 직접화법이다.
** 해당 칼럼은 하나님의 딸들(P164_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해야하는가)와 지중해의 눈으로 본 바울(P617_예배에서 여자와 남자)를 참조했다.
** 주목(注目)은 눈(目)과 시선(視線)을 주는 것이다.
** 예배때는 반드시 잠잠해야하고, 누군가 말을 하면, 듣기 위해 잠잠해야한다. 말함과 들음은 서로 짝궁이다. 누군가 말할 때, 같이 말하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