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서와 야곱의 상봉
창세기 32장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본 야곱은 “이스라엘”의 축복을 받았다. 하나님과 씨름을 해서, 야곱이 졌다. 패배가 승리가 된 것이다. 야곱이 하나님께 졌고, 그것이 ‘이스라엘’의 이름이다. 이스라엘은 “승리자 하나님, 하나님이 이겼다”는 뜻이다. 첫 번째 싸움은 야곱과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야곱을 이김으로, 야곱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야곱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이기신다. 속임수를 부려서 아버지 이삭을 속였을 그 때부터 얍복강에서 씨름하던 때까지,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했다. 긴 세월의 씨름은 하나님의 승리, 야곱의 실패로 마쳤다. 이삭이 묻기를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에서”라고 속이고 축복을 받은 야곱이다. 라반의 집에서 삼촌의 속임수로 아내가 뒤바뀐 사건은 충격적이다. 그래서, 야곱은 푸른 가지를 가지고 새끼들의 무늬를 뒤바꾼다. 그렇게 20년이 흘러,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삼촌이 뒤에서 추격하고, 밑에서는 형 에서가 올라오고, 야곱은 사면초가에 처했다. 해결은 하나님께서 하셨다. 야곱이 싸워 이긴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킨 것이다. 모든 인생은 하나님과 풀어야한다. 하나님을 이기려고 하면, 하나님은 친구도 적으로 돌리신다. 하나님과 싸우면, 하나님은 만물을 싸움의 도구로 삼고, 심지어 가족까지 원수가 된다. 하나님을 이기면 안된다. 하나님께 져야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겨야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긴다.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는 치욕적 역사의 사건이다. 인조가 그렇게 했다. 모양은 삼배구고두와 비슷하지만, 야곱은 7번 굽신거리면서, 에서에게 은혜를 구했다.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오는데, 죄를 자복하지 않을 수 있는가? 야곱이 에서라고 속이고서 축복을 받은 그 사건은 옳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행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에서에게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다. 얍복강에서 씨름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물었던 것이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속이는 자입니다. 사기꾼입니다.)”
야곱이 야곱임을 시인하고, 회개하니, 그때 이름이 바뀌었다. 이스라엘이다. 그리고, 형 에서와 상봉이 과거의 허물을 털어버리는 ‘이산가족 상봉’의 시간으로 바뀌었다. 십자가 사건 이후 무덤속에서 부활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해야한다. 우리가 의로운 행실을 자랑해봤자, 죄속에 살 뿐이다. 죄를 짓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세상살이다. 그저, “죄인입니다”라고 해야,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 쌍둥이로 태어나, 서로 싸우다가 결국 장남은 아버지의 친족인 이스마엘 쪽으로, 차자는 어머지의 친족인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살았다. 그리고, 다시 만났으니, 하나님을 통해 새롭게 부활한 것이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창33:10)
속에 있던 원한(怨恨)과 죄를 하나님께 훌훌 털어버리고, 죄인된 속성을 인정한 야곱은 스스로 형에게 낮아져서, 섬기는 자로서 형을 우러러 본 것이다. 입에 발린 상투적인 말로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마음이 변화되어, 원수처럼 무서운 사람도 하나님으로 사랑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형 에서에게도 은혜로 역사했을 것이다. 라반에게 그러했듯이….. 죽음의 얍복강 나루터가 하나님의 은혜로 사랑의 압복강 나루터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