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0월 4일, 요한복음 4장을 읽었다. 언어는 수면처럼 겉으로 보이는 뜻이 있고, 물밑처럼 속뜻이 있다. 그 깊이는 누구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언어와 문장은 읽을수록 그 뜻이 새롭다. 무한한 상상력이 펼쳐진다. 물속에 물고기와 각종 생물이 살 듯이, 뜻은 문장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성경을 읽을 때도 그렇다. 이때, 조심할 것은 ‘맥락의 물’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맥락의 물은 작가가 편집한 문장들의 문법장치다. 그 규칙만 준수하면, 성령을 통해 다양한 교훈과 바르게함과 깨달음과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요한복음을 읽을 때는 ‘창세기’를 많이 참고해야한다. 가령, ‘어린양’을 거론하면, ‘이삭번제의 숫양’을 연결해야하고, 포도주는 ‘홍수심판 후 포도원’을 떠올려야한다. 창세기 1:1과 요한복음 1:1이 ‘태초’로 연결된 것은 작가의 선언이며, 창세기의 속편임을 말하고 있다. 요한복음 1장의 그 빛은 창세기 1장의 그 빛과 같다.
요한복음의 시즌 1은 1장~4장까지다. 1장은 등장인물 소개, 2장은 가나의 혼인잔치(첫째 표적) 3장은 사건 발전, 4장은 마무리다. 요한복음 시즌 1(1~4장)은 첫째 표적과 둘째 표적이다. 모두 가나에서 벌어졌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시작해, “왕의 아들 살아남”으로 마쳐진다. 요한복음 작가는 왕의 아들 치유 사건에서 “네 아들이 살아있다”고 증거한다.
공관복음은 비슷한 사건을 두고 “치료관점”으로 증거하는데, 요한복음은 “네 아들이 살아있다”라고 표현한다. ‘살아있다’는 단어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시즌1은 물세례와 피세례(십자가)와 무덤부활로 마쳐진다. 가나의 혼인잔치는 물세례와 피세례이고, 왕의 아들 살아남은 무덤속 부활사건이다. 왕의 아들이 살아남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독생자 예수님의 살아남을 보여주는 ‘둘째 표적’이다.
요한복음은 표적사건을 통해 생활신앙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려주고 있다. 표적(表迹)은 무엇인가!! 어머니 마리아와 왕의 신하는 동일하게 ‘예수님의 말씀’에 주목한다. 표적은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돌항아리에 물을 담았더니 그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 말씀이 화학반응의 촉매제다. 왕의 아들도 말씀하신 그 때에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살아났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마리아 여인은 물항아리와 야곱의 우물까지 버리고 동네로 달려갔다. 여인 자체가 ‘진리의 항아리’가 된 것이다.
보이는 표적은 ‘간판’과 같고, ‘안내판’과 같고, ‘표지판’과 같고, ‘신호등’과 같다. “화장실 10m 앞” 또는 “화장실”의 표시가 있다고 하자. 우리는 그 표지판을 보고 걸어가서 화장실 문을 열고, 볼 일을 본다. 표적의 표지판을 따라, 궁극적 뜻을 찾아야한다. 표적의 표지판에서 멈추면 안된다. 표적을 추구하는 자들은 “화장실 10m”라는 표지판 밑에서 볼 일을 보는 자와 같고, “화장실”의 표시를 보고, 화장실 간판에서 볼 일을 보는 것과 같다. 이것을 일컬어, 성경은 “우상숭배”라고 한다.
열왕기하 18:4에 보면,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했다’고 했다. 불뱀사건에서 모세가 긴 장대에 ‘죽은 뱀’을 메달아 보는 자마다 살아난다고 했는데, ‘죽은 뱀의 표적’을 보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 치료의 표적이 일어난 것이다. 훗날, 장대에 메달린 구리뱀이 ‘신물’(神物)이 되어서, 그 뱀이 살아나서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표적은 표지판이다. 우상을 보며 예배하고 숭배하는 것은 화장실 표지판에서 볼 일 보는 자와 같다.
십자가도 동일하다. 예수님은 분명히 “모세의 구리뱀”에 “십자가 사건”을 비유했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표적의 하나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첫 번째 표적이 있었듯이, 십자가도 표적을 통해 보여지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다. 십자가를 봄으로 우리의 죄가 사해지는 능력이다. 십자가 자체가 숭배의 대상은 아닌 것이다.
(요한복음 3:13)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못박지 못한다면, 십자가는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십자가 앞에서 “나는 의인이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무익하게 한다. 우리의 죄인됨이 주님의 죽음을 거룩하게 하며, 주님의 죽음으로 우리는 죄인에서 의인으로 변화된다. 물이 포도주가 되듯, 우리에게 놀라운 영혼의 변화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없앤 곳마다 십자가의 능력은 없다. 십자가는 구원을 약속하는 주님의 표적인데, 그 표적없이 구원은 없다. 소금없이 어찌 음식을 짜게 할까? 십자가 없이 어찌 구원이 있으리요.
어머니 마리아는 주님께 “포도주가 없습니다”라고 그 현실을 인정했다. 그와 같이, 사마리아 여인도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자신의 사연을 인정했다. 이것을 ‘사마리아 여인의 속임수’로만 생각할 것은 아니다. 야곱의 우물, 세겜(수가)의 상징성은 얍복강 사건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나는 야곱입니다”라고 위대한 고백을 했더니, 그때 이스라엘로 개명되었다.
사마리아 여인도 역시 “남편이 없습니다”고 고백하니, 참 남편으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다. 이것이 창세기를 통해 요한복음을 보는 것이다. 남편이 있는가? 그 남편은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가짜 남편’이다. 법적인 남편도 그렇고, 의지하는 모든 남편들도 그렇다. ‘가짜 남편’은 참 남편을 전제한다. 참 남편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다. 보이는 남편은 ‘표적의 표지판’과 같아서, 참 남편을 알려주는 모형과 그림자인 것이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피곤해서 털썩 주저 앉으셨다. 예수님은 축지법을 쓰지 않으셨다. 두 발로 경보(競步)하듯 제자들과 함께 수가성(세겜)까지 걸어가셨다. 50km를 걸어본 적이 있는가? 예루살렘에서 세겜까지 50km다. 고흥 동강에서 벌교까지 뱀골재를 넘어가면 10km다. 중학교때 빠른 걸음으로 걷듯 뛰듯 걸어본 적이 있다. 1시간 걸렸다. 숨이 헐떡였다. 차로 가면 10분 거리인데, 걸어서 1시간이 걸린다. 주님은 그렇게 행하셨다. 5시간 총총걸음을 걸어서, 기어이 사마리아 여인을 먼저 기다리려고, 야곱의 우물에 도착해, “털썩 주저 앉으신” 주님이다. 그러므로,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는 사마리아 여인의 고백이 “인생의 절망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기 위한 고백임을 눈치채야한다. 사마리아 여인의 인생이 주님의 행위로 표현된 것이다. 요한복음의 표현방식이 그러하다.
요한복음 1장~4장까지 핵심 키워드는 ▲어린양 ▲요단강 ▲성전 ▲어머니 ▲돌항아리 ▲포도주 ▲야곱의 우물 ▲남편 ▲신랑 ▲혼인잔치 ▲정결예식 ▲성령 ▲독생자 등이다. 포도주, 남편, 신랑, 혼인잔치, 정결예식 등등 모두 생활속에 등장하는 소재들이다.
우리는 물이 포도주가 되는 표적을 쉽게 경험하지 못한다. 그러나, 복음을 통해 내면에서 샘솟는 영적 표적은 능히 경험할 수 있다. 생활속에 있는 모든 소재는 주님을 암시한다. 선풍기, 창문, 옷, 책상, 노트북, 샤워기, 냉장고, 의자, 집, 로봇청소기, 가방, 가스렌지, 비누, 세탁기 등등 모든 생활 필수품은 주님을 나타내는 ‘표적의 표지판’들이다. 그것들을 통해 주님의 은혜를 깨닫는 지혜가 필요하다. 요한복음은 그것을 말하고 있다.
내가 “주님!! 주님!! 주님!!”라고 부르니, 모기가 앞에 날아갔다. 옛날엔 “사탄 모기”하면서, 모기를 잡았다. 요즘은 “모기같은 미세한 성령의 음성”으로 해석한다. 나의 간구를 주님께서 들으심이다. ‘모기’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미세한 ‘성령의 모기 소리’를 알아듣는 영성이 필요하다.